박서보의 아날로그 '묘법'… 손자의 디지털로 재탄생
1000호 크기 연보라 캔버스
높이 2.5m 스크린으로 재현
2020년대 제작 묘법도 공개
부산 달맞이 고개의 조현화랑에 들어서면 평소와 다른 어두운 공간 속 강렬한 연보랏빛이 눈을 사로잡는다. 카메라가 천천히 줌아웃을 하면 영상 속 피사체가 캔버스임을 알게 된다. 박서보의 '묘법(Ecriture)'을 대형 스크린에 가득 담은 영상 작업이다.
가로 5.5m, 세로 2.5m의 스크린에 연보라색 묘법의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을 담아낸 이 작품은 아주 작은 지점에서 시작해 전체로 확장되면서, 평소 눈으로 관찰할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느끼게 한다. 박서보 작가의 손자 미디어아트 작가 박지환이 제작한 이 작업은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던 작가가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느낀 공포심에 대한 돌파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색채가 다음 세대를 통해 디지털 화면으로 재해석된 의미가 크다.
박서보 작가의 개인전이 조현화랑 달맞이와 해운대점에서 오는 11월 12일까지 열린다. 1991년 박서보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인연을 맺고, 이후 총 14번의 전시를 기획해온 조현화랑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 아직까지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박서보 작가의 신작 묘법을 선보인다.
박서보의 묘법은 1970년대 초기의 연필 묘법,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의 후기 색채 묘법으로 구분된다. 이번 전시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로, 총 12점의 후기 연필 묘법이 1978년에 제작된 초기 연필 묘법 1점과 함께 공개된다. 올해 제작·발표된 디지털로 묘법을 재해석한 비디오 작품이 1000호 크기 연보라 묘법 대작과 더불어 몰입감 있는 관객 참여형 설치로 소개된다. 이 외에도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세라믹 묘법 6점, 판화 작품 15점을 포함해 총 35점이 전시된다.
1000호에 달하는 박서보의 연보라 묘법은 20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캔버스 표면에 올려져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내는 과정에서 눌리고 밀리면서 선과 색을 안으로 흡수하는 한지의 물성이 연보라색과 어우러져 비움을 통한 채움의 정신성을 묵묵히 발현한다. 손의 흔적을 덮는 규칙적인 선이 만들어내는 절제에 담긴 색감이 자연의 자기 치유 능력을 발휘하듯 소멸하고 소생하길 반복하며 기운을 흡수하고 또 발산한다.
2층에서는 박서보가 1986년 중단했다가 최근에 작업을 재개한 신작 연필 묘법 12점이 나란히 걸렸다. 밝은 파스텔 톤의 색감 위로 반복과 평행의 리듬감 있는 신체성을 드러내는 연필 묘법에 대해 박서보 작가는 "무목적성으로 무한 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캔버스 표면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연필 묘법은 세 살 난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면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연필로 빗금을 치는 모습을 보고 체념을 떠올리면서 시작됐다.
1978년에 제작된 초기 연필 묘법 200호 한 점이 함께 걸리는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의 수련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화폭에 담아 조율하는 박서보의 묘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확장되는 힘을 느끼게 한다. 전쟁을 겪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했던 젊은 시절의 좌절을 돌파해낸 의지로, 불규칙하고 거친 자연에서 광활한 시야로 자정 능력을 길러낸 박서보에게 자연과 화폭은 물리적인 대상인 동시에 은유다.
신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후기 연필 묘법 시리즈를 초기 연필 묘법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디지털 묘법은 전시장에서뿐만 아니라 프리즈와 키아프 아트 페어 기간을 포함한 약 한 달간 서울 코엑스 SMTOWN(SM타운) 외벽에 위치한 국내 최대 규모의 커브드 LED 전광판에 송출될 예정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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