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탄핵의 추억과 탄핵의 현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대한민국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헌법재판소는 최순실의 국정개입을 통해 사익을 도모하도록 한 것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2016년 12월 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될 때까지만 해도 실제로 현직 대통령 탄핵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국민의 저항으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4·19 민주혁명과 6월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헌법절차에 따라 현직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단호한 판결은 우리 헌정사에 큰 울림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가치를 확인했다는 점이다. 헌법 조문에만 있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주권자로서 국민의 존재를 만천하에 각인시킨 역사적 사건이 됐다. 또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졌다. 수백만 촛불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우기도 했지만, 대통령을 파면시킨 것은 헌법 절차에 의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과정을 거친 결정이었다. 동시에 헌법과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진행되는 전 과정을 국민은 인내하면서 지켜봤다. 이는 국민의 높은 민주의식의 반영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탄핵이 가능했던 것은 현직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서 시작했다. 국정을 사유화하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저항권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했고. 여당의 일부도 뜻을 함께했다. 국회의원 과반수 의결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3분의 2의 찬성으로 의결됐다. 국회 의결 즉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고.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이후 헌법재판소의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다.
새삼 6년 6개월이나 지난 대통령 탄핵을 소환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대정부질문 첫날인 5일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한 국무총리에게 질의하면서 “장관이 결재한 것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대통령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라면서 그렇다면 이는 대통령이 법을 위반한 것이고, 탄핵까지 갈 소지가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여당 의원들은 거칠게 항의하면서 설 의원의 발언을 막아서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8일 국민의힘은 “본회의장에서 대통령을 향해서 탄핵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증거나 불법 사유에 대해 명확한 지적도 없이 묻지마 식으로 던지고 보는 행태를 반복했다”라며 대통령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국회의원 품위유지 의무도 위반했다며 설훈 의원에 대한 징계안을 제출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지난 6일 한 유튜브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링 위에 올라가 있는 선수들이 국민의 뜻, 국리민복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끌어내려야 하는데 그게 민주주의”라고 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에 대한 여당의 반발은 불문가지.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을 탄핵 운운하는 것은 대선 불복이며 헌법질서를 무너뜨리는 행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월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과정에도 대통령 탄핵 얘기가 나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에 나선 김기현 의원은 경쟁자인 안철수 후보를 겨냥해 “대선 욕심이 있는 분이 당 대표가 되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우려된다”라고 발언한 것. 물론 안철수 의원의 향후 행보에 대한 우려의 표현이었지만,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대통령 파면을 입에 올린 것 자체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야권 일각에서 대통령 탄핵을 꺼내는 것은 탄핵이 갖는 폭발성을 이용해 이슈를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지부진한 대여투쟁에 물꼬를 트는 일일 수도 있다. 그동안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로 수세적인 상황을 면치 못한 것을 감안하면,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 대표의 단식 정국을 돌파할 계기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심사도 깔려있다. 사실 야당이 탄핵이라는 강경한 발언을 하는 것은 일본 오염수 처리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으로 촉발된 이념 논쟁도 한몫했다. 잇따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강경 발언에 대한 국민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다. 아무리 대통령의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회 과반수 의석만으로는 탄핵이 불가능하니,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운영에 대해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더욱 힘을 실어달라는 주문이다. 내년 총선에서 야당이 대통령의 탄핵을 결의할 정도의 의석을 갖게 된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지층에게 심어줄 수 있다. 지지층 결집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중도층을 끌어들이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탄핵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지층이 결집하면 반대층도 결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중도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자칫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던 야당과, 이에 동조했던 구여권 후보들이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선택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탄핵을 제기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의 최근 행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레토릭으로서의 ‘탄핵’은 내년 총선 판도를 결정할 이슈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탄핵의 추억과 탄핵의 현실은 다르다.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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