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쇠고랑을 찬 노예, 인신매매와 갈취···광활한 ‘무법의 바다’[책과 삶]

허진무 기자 2023. 9. 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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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 태국 어선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 아고라 제공

무법의 바다

이언 어비나 지음·박희원 옮김 | 아고라 | 784쪽 | 3만2000원

한국 국적 저인망 어선 오양70호는 2010년 8월14일 밤 뉴질랜드 차머스항에서 동쪽 640㎞ 떨어진 남태평양 어장으로 향했다. 선장은 선원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여 사실상 24시간 내내 일했다. 오양70호는 바다에 어망을 내려 어마어마한 양의 청대구를 잡아올렸다. 적재량을 넘겨서까지 잡았다. 오양70호는 어망에 잡힌 청대구의 무게 때문에 바다에 가라앉았다. 선장은 어망을 절단하자는 선원들의 애원을 침몰 직전까지 무시했다. 이 사고로 선원 6명이 사망했다.

오양75호의 강제 노동과 성적 학대는 2011년 6월20일 배에서 탈출한 인도네시아 선원 32명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들은 한국인 선원들이 자신들을 상습 구타했고 갑판장은 상습 강간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식사에는 죽은 벌레가 박혀 있었고 매트리스에는 진드기가 들끓었다. 선장은 외국인 선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여권을 압수했다.

한국 저인망 어선 ‘오양70호’의 모습. 아고라 제공
한국 선원이 어획물 분류대에서 작업하는 모습. 아고라 제공

미국 저널리스트 이언 어비나가 르포르타주 <무법의 바다>에 한국 사조그룹 계열사 사조오양 선단의 범죄를 적은 내용이다. 어비나는 뉴욕타임스 탐사보도 기자로 일하며 미국 최고 권위의 언론인상인 퓰리처상을 받은 인물이다. 현재는 바다의 환경, 인권, 노동에 대한 비영리 저널리즘 단체 ‘무법의 바다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어비나가 탐사한 바다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어비나는 매년 태국 남중국해에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 이주민 수만명이 흘러들어 ‘해상 노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신매매와 강제 노동은 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비나가 2014년 9월 만난 캄보디아인 랑 롱은 자선단체가 선장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구조한 ‘노예’였다. 롱은 구조되기 전까지 3년 동안 태국 저인망 어선에 감금돼 목에 쇠고랑을 차고 노동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채무에 얽매여 고립된 바다에서 강제 노동에 빠진다. 어선에 노동자를 팔아넘기는 인신매매업자들은 노래주점을 운영한다. 태국의 항구 도시에는 일자리를 찾아 무일푼으로 수백㎞를 걸어온 가난한 남성들이 모여든다. 이들이 제공받은 식사, 술, 마약, 잠자리는 차곡차곡 채무로 쌓인다. 업자들은 인신매매한 여성들을 이용한 성매매로 남성들을 채무의 늪에 빠뜨려 인신매매한다. 성 판매자와 성 구매자 상당수는 미성년 아동들이다.

필리핀 칼리보 앞마다 시부얀해에서 선원들이 안초비 어망을 잡아당기고 있다. 아고라 제공

바다는 환경오염의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미국 국적 크루즈선 캐리비언프린세스는 2013년 8월23일 ‘마법의 관’이라고 불리는 불법 장치를 통해 맹독성 폐수를 바다에 쏟았다. 처리 비용 수백만달러와 항만 적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어비나에 따르면 크루즈 정기선은 벙커유를 여과하는 과정에서 ‘엔진 슬러지’라고 불리는 독성 물질을 바다에 흘려보낸다. 오수 탱크로 흘러드는 윤활제 유출분도 대량 투기한다. 석유가스 기업은 바다에 설치한 시추 시설이 노화되면 수몰시킨다.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의 정부가 자국 산업이 폐기물을 바다에 대량 투기하는 것을 인가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바투 히자우의 광산으로부터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수송관을 건설해 유독성 슬러지를 하루 16만t씩 바다에 뿜어낸다. 어비나는 이런 방식으로 광업 폐기물을 처리하는 광산이 파푸아뉴기니와 노르웨이를 포함해 최소한 8개국 16개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수세기 동안 인류는 바다를 무한의 은유로 여겼다. 바다의 광대함에 만물을 흡수하고 소화하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 광활함은 오랜 시간 우리에게 사실상 모든 것을 바다에 내버려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어주었다.”

인도네시아 순찰선 뒤편에 있던 베트남인 억류자 수십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베트남 해경선을 향해 헤엄치고 있다. 아고라 제공
퇴역 육군 소령 패디 로이 베이츠가 영국 해안에 버려진 방공구조물을 점거하고 선포한 국가 ‘시랜드’의 모습. 아고라 제공

바다는 그 광활함 때문에 법이 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다. 방글라데시 인근 벵골만에선 무장 갱단이 보호 명목으로 어선을 갈취하고, 어민을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만연한다. 이런 살인과 폭력 사건 대다수는 신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취재한 무법의 바다 이야기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한 가지 주제는 바다의 광활함이 악의적 행위자 추적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범죄자 적발이 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어비나는 비행기를 타고 40만4000㎞를, 배를 타고 1만2000해리를 이동했다. 바다에 버려진 구조물을 ‘국가’로 선포한 시랜드, 배에서 죄수를 고문한 미군, 고래 포경꾼을 쫓는 환경보호 활동가, 임신중지가 불법인 나라의 여성을 공해로 데려가 수술하는 의사, 소말리아 정부의 비호를 받는 해적 등을 추적하며 기록했다. 무법적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이유까지 살펴본다. 선원 보호, 투명한 식품 공급, 해상 범죄 감시 등의 대안도 제시한다.

“바다가 무법 상태인 것은 바다의 본질이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이곳이 공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바다에서 솟아나는 생명들을 수용하고 상찬해오면서도 타락을 숨겨주는 이곳의 역할에는 대체로 눈을 감았다. 이 사실을 마주 대하기 전에는 이 프런티어(미개척지)를 길들이거나 보호하는 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포경선 닛신마루호 위의 고래. 아고라 제공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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