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미술관 2편] "평화를 노래하다"…이응노 화백
[EBS 뉴스12]
교과서 미술관 두 번째 시간입니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평화'를 노래한 화백이죠.
악조건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우며, 평생 2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고암 이응노 화백.
교과서 속에 담긴 그의 작품과 작품 세계를 최이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있는 이응노 화백의 그림, <닭>입니다.
망설임 없는 수묵 기법으로 그려낸 것처럼 보이는 수탉의 볏과 풍성한 깃에서 민족의 기상과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인터뷰: 이갑재 관장 / 이응노미술관
"20~30점 닭으로만 표현된 작품이 있거든요. 그만큼 어떤 소재에 집착했을 때 그 작품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고 연작 시리즈로 이렇게 계속 작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수묵 담채화로 일찍이 화백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응노 화백의 대표작은 작품 <군상>입니다.
커다란 캔버스를 메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
어떤 이들은 환희에 찬 군무를 추고, 어떤 이들은 분노에 휩싸여, 싸움을 하는 듯 보입니다.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이 화백에게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은 마음속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화백은 대나무를 그리던 힘과 운필로 단순화된 인간 형상을 캔버스에 토해냈습니다.
반복적인 붓놀림, 어느새 인간 군상이 200호 화면을 뒤덮었습니다.
서로 닮은 듯,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세상.
이 화백은 <군상> 연작을 통해, '공존과 평화'라는 완결된 메시지를 전합니다.
<군상> 연작이 이 화백의 작품 세계를 집약한 '백미'로 꼽히는 이윱니다.
충남 홍성에서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이응노 화백은 대나무 그림의 대가였던 김규진을 사사했습니다.
실력을 처음 인정받았던 것도 대나무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이 곧 인생'이었던 이응노 화백은 대나무 작가란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30살이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넘어가 서양화를 접하고 해방 전후를 지내며 동서양의 회화적 특성을 모두 익힙니다.
그러다 1950년대 후반에 '카셀 도큐멘타'라는 세계적인 현대미술제전에 참가하면서 또 다른 대표작 <문자 추상>의 근본이 되는 콜라주에 눈을 뜹니다.
인터뷰: 류철하 큐레이터
"(이 화백은) 용구의 혁명이라고 얘기했어요. 동양화, 단순한 먹을 이렇게 해놓는 이응노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매체나 형식을 이용해서 화면 자체에서 온갖 실험들이 난무하는 것이 현대미술이구나,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이 추상이구나."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서양 추상미술과 동양의 전통 서화를 접목한 이 화백만의 추상 작품들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이 화백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고국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좌절도 잠시, 옥중에서도 밥풀과 간장 등을 통해 재료에 국한되지 않는 추상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만든 옥중 작품만 300여 점.
이응노 화백은 "감옥은 내게 실험적인 작품제작이 가능한 학교였다"고 평했습니다.
최근 이응노 미술관은 대전 출신의 동양화 6대 거장, 박승무 화백과의 생전 교류 사실을 밝혀내며 고암 예술의 동양적 기반을 분석했습니다.
광복 전후, 심향과 고암이 과거 주고 받았던 편지를 발견해, 둘의 예술사적 교감을 찾아 낸겁니다.
둘은 합작도란 작품을 같이 제작하며, 동양화단의 미래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갑재 관장 / 이응노미술관
"박승무 선생님이 10살 11살 위예요. 이응노 선생님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존칭을 써가면서 서로 대우를 해줬다고 그래요, 작가로서. 그래서 그때의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천첩운산이라는) 작품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평생, 2만 점 이상의 작품을 남기며, 어떤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이응노 화백.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 혼이 아직, 살아 숨쉽니다.
EBS 뉴스 최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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