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다, 달콤모호한 ‘하루키적’ 세계관···“집대성인가, 재생산인가”[책과 삶]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768쪽 | 1만9500원
‘나’와 ‘너’가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장이다. 3등과 4등으로 나란히 앉았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너는 1학년이었다. 열일곱, 열여섯 때다. 그 여름 해 질 녘 강가 풀밭 위에서 내 마음은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출렁인다. 내 몸과 마음이 간절히 너를 원한다. 미숙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나와 너는 “특별한 비밀 세계”를 함께 만들고 나눈다.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도시 즉 비밀세계 이야기를 꺼낸 건 너다. 이 도시엔 아름다운 한줄기 강이 흐른다. 세 개의 돌다리가 놓였다.
나와 너의 특별한 비밀 세계
이곳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주택에 사람들이 산다. 전기도 가스도 없다. 유채 기름으로 램프를 밝히고, 장작불로 요리한다. 간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 외뿔 달린 과묵한 짐승인 단각수(單角獸)는 아침이면 도시에 들어왔다가 밤엔 벽 바깥 서식지로 돌아간다. 이 짐승은 도시에서 자라는 특수한 나무열매와 이파리만 먹고 산다.
시간은 ‘대략적’이다. 중앙 광장 시계탑엔 시곗바늘은 없다. “나날과 계절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다.
너가 말했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이 도시는 너가 만든 것이다. 내가 묻고, 너가 답하면서 도시의 구체적인 세부를 결정하고, 기록해 나간다.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눈에 보이는 것,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축해내는 데는 나도 적잖이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적는다. 고대 철학자나 종교가가 저마다 충실하고 면밀한 서기를, 혹은 사도使徒라고 불리는 이들을 배후에 거느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유능한 서기로서, 혹은 충실한 사도로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작은 전용 공책까지 마련했다. 그 여름, 우리는 그 공동 작업에 푹 빠져 있었다.”
도시는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그 모양을 바꿔나가는 생물 같기도 한 곳이다.
나는 그곳으로 가 진짜 너를 만나고 싶다.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너가 말한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곳에 간들 너는 나에 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12월 어느 날, 너의 편지가 도착한다. 세살 때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가 됐고, 지금 생명력 같은 것이 빠져나간다고 했다. 공원 벤치에서 내게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며 편지를 끝냈다. “나는 너의 것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나의 모두를 너한테 주고 싶어. 하나도 남김없이.”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벽 안과 밖 중 진짜 세계는 어디인가
40대가 된 어느 날 그 도시로 가게 된다. 벽 바깥 세계에서 함께 있을 때 너는 도서관에서 일한다고 했다. 너는 ‘꿈 읽는 이’고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다고 했다. 도시에서 너를 꼭 닮은 ‘분신’과 데이트를 했던 날을 떠올린다. 도서관에서 만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저는 이곳 말고 다른 도시는 몰라요. 여기서 태어나 벽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나는 도시의 ‘꿈 읽는 자’로 임명됐다. 너가 타 주는 약초차를 마시며 ‘오래된 꿈’을 읽어간다. ‘오래된 꿈’은 댤걀처럼 생겼다. 표면은 대리석처럼 매끈하나 묵직함은 없다.
종종 ‘그림자 쉼터’로 가 내 그림자와 만난다. 도시 문지기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내 그림자를 덥석 움켜쥐고 벗겨냈다. 내 그림자는 도시와 바깥 세계의 중간 지점인 ‘그림자 쉼터’에서 살아간다. “나는 바깥세계에 나갈 수 없고, 그림자는 도시로 들어올 수 없다.” 이 도시 모든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은 그림자를 지녀선 안 된다.
내 그림자는 도시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바깥으로 나가자고 나를 설득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 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그림자는 나와 다시 하나 되길 원했다. 그게 그림자의 생명력을 되찾는 길이다. 그림자와 내가 하나가 되면 도시에 머무를 수가 없다. 그림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본체가 아니라 그림자라고 했다.
‘오래된 꿈’은 ‘혼돈의 소우주’
그림자는 ‘오래된 꿈’에 관해서도 해석을 내놓았다.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懊惱),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그 씨앗을 밀폐용기에 담아 도서관에 보관한 게 ‘오래된 꿈’이라고 그림자가 말한다. 나는 ‘오래된 꿈’이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채로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디로 택할지 고민한다. 이 도시의 너를 떠나야 하는 것 때문에 망설인다. 벽 바깥에 너와 데이트한 기억과 그 장소가 존재한다. 고민 끝에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8m 높이 벽돌로 지은 도시 벽은 그 누구도 넘을 수도, 부술 수도 없다. 도시에 발 들이면 문을 통해 나갈 수 없는 게 도시의 규칙이다. 벽 북쪽 문은 문지기가 지킨다. 아침저녁 단각수를 통과시킬 때만 연다. 견고한 벽 너머로 갈 수 있을까. 내 그림자는 단단한 벽이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뚝 치솟았으나 속은 젤리 같은 벽을 통과해 바깥 세계로 이어지는 웅덩이에 도착한다. 사람들의 도시 탈출 가능성을 봉쇄하려 위험한 장소라는 인식을 주입한 웅덩이다.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미”를 두고 다시 고민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격하게 부딪히는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실과 비현실이 격하게” 부딪힌다. 도시 사람이 본체인지, 바깥 세계 사람이 본체인지 알 수 없다. 지금 현실인 듯한 벽 바깥 세계에도 그림자 없는 ‘유령’이 등장한다. 가설과 사실을 구별하기 힘들다.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호하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가?”(나의 대사).
나와 너 이야기가 중심인 1부는 무라카미가 1980년 문예지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다듬고 보완했다. 2·3부도 비슷한 내용이 변주, 반복된다.
나는 도쿄 출판유통회사를 관두고 후쿠시마현 시골 ‘Z** 마을 도서관’ 관장으로 간다. 전임 관장이 ‘그림자 없는 유령’인 도서관장 고야스가 나를 초청했다. 그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일시적인 형태를 띤 채 계속 이 도서관”에 머물렀다. 나가 너를 잃었듯 고야스도 생전 비극적 사고로 아들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고야스도 바늘 없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유령임을 고백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그림자를 잃었던 경험이 있지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마을 도서관 책을 읽으면 마침표 하나까지 암기하는 ‘옐로 서브머린(동명의 노래로 만든 비틀즈 영화) 소년’도 등장한다.
무라카미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여러 인터뷰를 보면 책 의미와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둔 듯 하다. 해석과 분석도 ‘불확실’할 듯하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나 본체와 그림자의 이야기는 언뜻 이데아론을 설명하는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 같지만, 어느 쪽이 이데아인지 알 수 없다. 책엔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의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영향을 받은 듯도 보인다.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
그림자는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같은 인간의 덧없음에 관한 대사와 자주 이어진다. 무라카미는 의지와 의식, 죽음과 사후 세계, 영혼 같은 철학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두루 다룬다.
‘벽’은 소설을 끌고 가는 주요 모티프이자 축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성벽과도 유사하다. 무라카미는 신작 소설 속 벽과 현실의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연결한다. 팬데믹과 전쟁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은 소설에 없다. 벽 안쪽 도시에 사는 장교 출신 노인이 한 대사에서 무라카미의 말뜻을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그곳(벽 바깥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지. 그 시절, 전쟁이 일어났네. 어디와 어디의 전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뭐 지금 와서는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이지. 그쪽에선 늘 어딘가와 어딘가가 싸우고 있었으니까.”
역병에 관한 ‘나’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도시는, 아니, 당시 도시를 다스리던 사람들은 바깥 세계에 만연하는 역병을 차단하기 위해 높고 튼튼한 벽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물샐틈없이 봉인하듯. 그래서 누구 하나 안으로 들이지도,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는 견고한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 벽의 축조에는 아마 주술적 요소도 포함됐을 테고. 하지만 이윽고 어느 단계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져-그게 뭔지는 몰라도-벽은 독자적인 의지와 힘을 지니고 기능하게 되었다 그 힘은 이미 사람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런 얘기일까?”
“어떤 역병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아. 그런데도 벽은 변함없이 엄중하게 폐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아무도 안에 들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아. 그 이유는 뭘까?”
벽은 존재하는 것일까. 소설 제목에 관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무라카미의 2009년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문인 ‘벽과 달걀’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는 “높고 견고한 벽이 있고, 벽에 부딪히면 부서지는 달걀이 있다면, 나는 늘 달걀 쪽에 설 것”이라고 했다. 2014년 벨트문학상 수상 연설에서도 “설사 벽에 갇혀 있더라도 벽이 없는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서 “지금 벽과 싸우고 있는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소설의 벽은 무라카미 연설의 벽처럼 그 뜻이 뚜렷하지 않다. 안과 밖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할지, 또 어느 쪽에 속했는지 모호하다.
산 생명체같이 형상을 바꿔나가는 ‘그 불확실한 벽’
소설은 수십 년 지속하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 벽 안팎 모두 ‘도서관’이 등장하는데, 책 읽기와 도서관의 존재 의미에 관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다. “그저 많은 책을 모아둔 공공시설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고야스).
무라카미의 음악과 독서 감상 이력, 끝까지 읽게 만드는 문장,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도 나온 벽의 변주 등 독자에게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펼쳐진다. 일본 소설가 오가와 테쓰(사토시)가 6월 무라카미 소설을 펴낸 신초샤에 실은 평의 제목 같은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집대성인가, 재생산인가’. 오가와는 무라카미가 40여 전 뿌린 씨를 ‘수확’했다고 평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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