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들은 지금 왜 동해안으로 모일까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유효기간 다한 공간의 재탄생, 크리에이터의 발길 이끌어
(시사저널=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강원도 동해안 도시들이 뜨고 있다. 양양이 서핑비치로 이름을 날리더니, 인스타그램에 등장할 법한 핫플레이스가 해변을 따라 동해안 전체로 퍼져 나간 모양새다. 감자, 문어 등 강원도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들도 이색적이다. 코로나를 겪으며 해외 대신 국내 여행지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강원도 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 열기가 다소 수그러들었을지 몰라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다.
할아버지 조선소 물려받은 손자, 이색 놀이터로 만들다
청초호 변에 '칠성조선소'라는 곳이 있다. 일단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여기가 맞나 싶은 느낌이 들면 제대로 찾아간 것이다. 경영자 가족이 살던 작은 건물은 친환경 소품샵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내보내던 자리는 공연도 할 수 있는 광장으로 바뀌었다. 버려진 조선소를 누군가 사들여서 리모델링을 했을 거란 짐작과 달리, 처음 조선소를 세운 이의 손자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1952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원산조선소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고 한다. 흔히 상상하는 대형 선박이 아니라 작은 목선을 만들던 조선소였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창업자가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하지만 조선소가 2대를 넘어 3대째 주인을 맞이했을 땐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카페를 열자 조선소의 독특한 정취가 방문객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칠성조선소가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다.
소규모 조선소에서 주로 만들어지던 작은 배들은 손으로 직접 선체에 배 이름을 쓰는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었다. 때문에 글씨체만 봐도 어느 조선소의 배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만의 독특한 글씨체가 미술을 공부한 아들의 눈에는 개성 넘치는 디자인으로 보였다. 그렇게 칠성조선소 출신의 배를 상징하던 글씨는 가족의 기억을 담은 폰트로 재탄생됐다. 한 켠에는 나무 재료들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놀이터가 있는데, 어린 시절 조선소에서 뛰어 놀았던 추억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완성된 배들이 바다로 나가길 기다리는 풍경을 닮았다.
시대 흐름 속에 비록 조선소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무엇을 기억하고 남겨야 할지 고민했다. 그 결과, 배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가던 시간들은 이제 한 가족만의 추억이 아니라 속초를 찾는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문화가 됐다. 이곳을 단지 풍경 좋고 인테리어 멋있는 흔한 대형 카페 중 하나라고 하기엔 조금 아쉬운 이유다.
화마에 뒤덮였던 펜션이 지역 커뮤니티 중심지로
서핑의 매력에 빠진 한 의류 사업가는 동해안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불에 타 황폐해진 어느 펜션 건물이었다. 2019년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집어 삼켰던 산불이 남긴 생채기 중 하나였다. 비록 외관은 흉물스러웠지만 한쪽으로는 동해안 수평선이, 다른 한쪽으로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이는 위치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서핑비치로 떠들썩한 동네가 아닌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조용한 고성군 봉포해변에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약칭 이사바)'이란 문화공간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화마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던 공간은 취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을음이 남은 벽면과 버려진 폐자재도 적절히 남기고 활용했다. 여름 휴가철에는 아프리카 음악 공연이 펼쳐지고 매주 금요일이면 해변 쓰레기를 줍는 비치클린 캠페인을 한다. 참여 기회는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비치클린에 사용되는 마대자루에도 의류 디자이너의 감각이 녹아들어가 그것만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념품이 됐다. 서핑을 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곳에서는 색다른 해변 레저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내 공간만 아닌 지역 전체를 생각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처음에는 주민들로부터 경계심 어린 눈초리도 받았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을 테다. 하지만 새로운 시선은 낯설지만 매력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이들을 불러 모은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힘이다. 그러다 처음의 방향을 잃고 흔해빠진 관광지가 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이사바 대표는 지역 커뮤니티에 먼저 다가가고 가까워지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 공간 하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포해변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 노력이 통한 것일까. 봉포해변에서는 조용하지만 눈에 띄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공간은 문화를 만들어낸다. 유효기간이 다한 공간을 재생시킨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그곳에 예술 전시를 하고 공연을 한다고 해서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비하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문화 생산자들이 필요하다. '크리에이터'가 찾는 동네, 그것이 강원도 동해안 도시들의 현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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