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벌고 오래 묵었다, K-부채의 두 얼굴

장혁진 2023. 9. 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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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조' 우리 가계 대출 특징은
소득 상위 20%, 만기 상환 비중 커
대출 규제는 신규 차입에 집중
금융당국, 다음 주 가계부채 대책 발표


가계부채가 꼭 악(惡)은 아니다. 빚은 부를 늘리고, 소비를 촉진하기도 한다. 기업으로 흘러가 고용·임금이 증가할 수도 있다. 금융의 역사가 이런 경제의 선순환을 증명한다. 학계에선 유량 효과(Flow effect)라고도 한다. 우리 경제의 가계부채는 어떨까. 실제로 가계 빚은 자산 가격을 띄워 우리 경제를 지탱해 온 측면도 있다. 빚을 통한 성장이 앞으로도 가능할까. 현재 우리 가계 대출(판매신용 제외 1,749조 원, 올해 2분기 기준)이 어떤 얼굴인지 살펴보는 게 먼저다.

■ ① 고소득자 빚이 많고, 한 번에 다 갚아야 한다

K-부채의 절반 이상은 고소득자에 있다. 한국은행이 7월 발간한 <장기구조적 관점에서 본 가계부채 증가의 원인과 영향>을 보면 지난해 말 기준 5분위(소득 상위 20%)가 가진 대출이 전체 잔액의 53%였다. 우리 가계 전체 소득의 37%를 차지한 소득 상위 20%가, 전체 대출의 과반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소득 점유율보다 대출 점유율이 높은 건 5분위가 전체 가계에서 유일하다. 한은은 "소득 수준에 따라 대출 접근성에 큰 격차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소득자에 빚이 몰려있는 건 다른 한편으론 떼일 위험이 적다고도 볼 수 있다. 금융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가계 빚의 또 다른 특징은 만기일시상환의 비중이 전체의 53.7%(지난해 말 기준)라는 점이다. 대부분 전세·신용·중도금 대출인데, 가계는 상환 시점에 빚을 갚기보다는 만기를 재연장하는 추세(신용대출의 만기 연장률은 87%)다.


금융당국은 정책적으로 분할상환을 유도하면서 차주들이 조금씩이라도 빚을 갚아 나가길 유도하지만, 이게 잘 안 된다. 차주들은 대개 빌린 돈을 당장 현금화하기 어려운 자산(부동산, 주식, 채권 등)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융사들의 영업 방침이 규제에 따라 자주 바뀌는 편이기 때문에 만기 때마다 차환(다시 돈을 빌려서 갚음) 위험이 커질 수 있다.

■ ② 어쩌면 덩치가 더 클 수도 있다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 101.5%로 집계됐다. 가계 빚이 GDP보다 많은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4곳 정도에 불과하다. 1위는 스위스(128.3%)다.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제도, 전세보증금이 가계부채 국제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세보증금은 임대인이 임차인으로부터 받는 사실상의 '사적 대출'이다. 임대인은 전세보증금을 받아 투자를 하든, 대출을 갚든 어딘가에 쓴다.

전세보증금을 우리 가계부채에 얹을 경우 전체 빚 규모는 2,925조 원(지난해 말 기준)이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스위스를 제치고 1위로 올라간다. 물론 논란은 있다. 임차인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받아서 임대인에게 제공하는 전세자금대출은 기존 가계부채 통계상 주택담보대출 안에 이미 포함돼 있다. 또 전세보증금의 위험 평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부채를 과대평가해 대외신인도에 영향을 줄 필요가 있냐는 지적도 있다.


우리 부채를 과소평가할 여지를 없애자는 반론도 물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전문위원은 지난달 <빚의 청구서가 날아오고 있다>라는 보고서에서 "가계부채가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과도한 채무부담으로 인해 가계소비가 오히려 위축되고 실물경제 성장세를 제약하는 등 부채의 부정적 효과가 순기능을 상회하게 된다"고 말했다.

■ ③ 묵은 빚이 많다

우리는 빚으로 쌓은 집들이 무너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기억한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후 독하게 살(빚)을 뺐다(디레버리징). 2011년 이후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완만하게 줄이거나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우리나라와 중국, 태국 등은 2011년 이후 상승세를 이어갔다.


우리의 경우 오래전부터 쭉 누적된 부채, '묵은 빚'이 많다는 얘기다. 빚에 나이가 있다면 늙은 빚은 내버려 두고 젊은 빚, 그러니까 신규 대출에 새로운 규제 방안을 적용하는 식으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정책을 펴 왔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이 대표적이다. DSR은 1년 단위로 소득 대비 원리금 감당 능력을 보고 대출을 내주는 제도다. 2018년부터 은행권에서 시범 도입했는데, 기존 대출 만기연장 시에는 적용되지 않고 신규대출과 기존대출금 증액에만 적용된다.

대출 시점에 따라 차주간 차별이 있다 보니, 새로 빚을 내야 하는 청년들에겐 억울한 측면도 있다. 금융당국이 최근 50년 만기 주담대의 연령 제한(만 34세)을 언급했다가, 중·장년층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우리 가계 빚은 세대갈등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 가계부채 대책 다음 주 발표

한국은행은 지난달 <민간소비 회복 모멘텀 평가> 보고서에서 높은 가계부채에 고금리가 맞물려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어나 소비 회복을 제한할 것이라고 봤다. 단기적으로 빚은 소비를 늘릴 수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누적된 부채는 오히려 소비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큰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가계부채 규모를 GDP 대비 50~80% 정도로 제시한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가계 빚이 누적될수록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우리 가계 빚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주택담보대출이다. 올해 2분기 기준 1,031조 원이다. 최근 들어 50년 만기 상품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늘었다. 5대 은행의 경우 지난달에만 주담대가 2조 1,122억 원 뛰었다. 한 달 만에 2조 원 넘게 증가한 건 8개월 만에 처음이다.

금융당국은 다음 주 가계대출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의 DSR 계산식을 바꾸는 방안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만기는 50년이라도 DSR 산정 때는 40년에 걸쳐 갚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갚는 기간이 확 줄기 때문에 빌릴 수 있는 금액(대출 한도)도 줄어들게 된다. 이미 NH농협은행과 하나은행은 50년 만기 상품 판매를 중단하거나 더 이상 안 팔겠다고 선언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다주택자·집단대출 등의 부문에서 대출이 크게 늘어나지 않도록 업권의 의견을 반영해 은행업 감독규정 시행세칙 개정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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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진 기자 (analog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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