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살인 누명 쓴 한국 청년, 그를 위해 직접 변호사가 된 친구…미국 사회 뒤집은 '이철수 사건'

강선애 2023. 9. 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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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7일 방송된 '이상한 나라의 철수 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오나라, 방송인 홍석천, 개그맨 정성호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범인 한국인 이철수

실제 인물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있지? 대단한 인물이나 사건을 배경으로 노래를 만들잖아. 1979년 미국에서도 한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있어. 그런데 미국에서 만들어진 노래인데, 그 노래의 주인공은 한국인이었어. 그 노래의 가사는 이래.

"This is a story about a man named Chol Soo Lee(이것은 철수리 라는 청년의 이야기야)"

"His case is not uncommon(그가 겪은 일은 낯설지가 않아)"

"It reflects on you and me(너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어)"

이 노래의 이름은 'The Ballad Of Chol Soo Lee(철수의 노래)'야. 그 당시 미국 각지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어. 이철수라는 남자는 당시 미국 사회를 바꾼, 거대한 상징으로 떠올랐어. 지금부터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73년 6월 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이야. 철수는 다섯 명의 동양인 청년들과 함께 어떤 방으로 들어 섰어. 경찰이 숫자가 적힌 판을 하나씩 들려줘. 그리고 한 쪽을 보고 일렬로 서래. 강한 조명이 철수를 비추고, 조명 뒤에서 셔터 소리가 나. 이건 '라인업' 절차야.

어떤 사건의 목격자를 불러 용의자들 중에 범인을 고르게 하는 거야. 이 6명의 동양인들은 일주일 전 있었던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이야. 21살인 철수도 여기에 있었어. 일주일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이 일어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한 일요일. 한 중국인 남자가 교차로를 건너는데, 갑자기 탕탕! 총성이 울려. 남자는 쓰러졌고, 권총을 든 괴한은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향해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어. 그리고 사라졌어. 총을 맞은 사람은 현장에서 사망했어. 사망한 사람은, 차이나타운 갱단의 간부였어.

당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두 갱단이 장악하고 있었어. 하나는 '와칭', 다른 하나는 '조보이즈'였어. 중국인 청년들로 이뤄진 갱단이야. 서로 세력 다툼을 하면서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어. 그러던 중, 와칭의 고문 입이탁이 살해된 거야. 경찰은 이 사건을 두 갱단 사이의 세력 다툼이라 판단했어.

이 '라인업' 사진 중, 누가 범인일까.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담담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5번'을 든 남자야. 이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이철수야. 당시 6명의 목격자 중 3명이, 철수를 범인으로 지목했어.

얼마 후 경찰의 수사결과가 발표됐어. 경찰은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범인은 갱단의 청부를 받은 킬러 철수리"라고 했어. 1년 후 법정에 선 철수에게 종신형 판결이 내려져. 이렇게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 한국인 청년 철수는 세상으로부터 잊혔어.

철수의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4년 후야.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야.

"4년 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을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은 철수 리가 교도소에서 또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이후 열리게 될 재판에서 살인죄가 인정되면 그는 캘리포니아주의 부활된 새 사형법에 따라 10년 만에 처음으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캘리포니아주가 10년 만에 사형제를 부활시켰는데, 한국인인 이철수가 첫번째 사형수가 될 지도 모른다는 거야.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던 한국인 여성 김성수 씨도 당시 이 기사를 읽었어.

"깜짝 놀랐죠. '철수 리' 그렇게 나왔으니까. 한국 사람들이 이민 와서 다 열심히 사는 줄만 알았는데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는 건 상상을 못했죠. 우리 한국이 좀 창피하잖아요. 치욕적이잖아요. 첫번째 케이스로 이름이 올라가게 되니까."

-김성수, 당시 새크라멘토 거주

성수 씨는 바로 남편에게 기사를 보여줬어. 마침 남편이 변호사였거든. 유재건 변호사야. 한국계 변호사가 드물던 시절인데, 대단한 분이지. 유 변호사는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결심했어. 그리고는 다음날, 이 사람한테 전화를 걸었어.

바로 탐사보도 전문기자 이경원. 미국 일간지 최초의 한국인 기자야. 별명이 '형사 콜롬보'로, 각종 사건과 사회문제를 끝까지 파헤치는 베테랑 기자였어.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철수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눴어. 그러던 중 이경원 기자는 "이철수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어. 유 변호사는 가슴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대. 그럼 이철수가 누명을 썼다는 이야기니까. 이 기자는 유 변호사에게 "우리가 직접 철수를 만나보자"고 제안했어. 그때는 상상도 못했어. 이 만남이 미국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일들을 불러오게 될 줄은.

▲ 외톨이 소년 이철수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철수가 있는 교도소로 향했어.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자를 수용하는 트레이시 교도소야. 면회실에서 철수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 한 청년이 들어와 칸막이 너머 의자에 앉아. 작고 마른 체형에 수염을 기른 동양인 청년, 이제 25살이 된 이철수야.

이 변호사는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이 없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어. 그러자 철수는 "도움이요?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헛걸음 하셨네요. 돌아가세요"라고 냉랭하게 말했어.

"한국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안 좋아서 안 만나겠다고 안 만나줬어요. 사정사정 해서 만났는데, 자기는 도움 필요 없다고. 여태까지 한국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왔다가 한 번도 도와준 적도 없고. 자기는 도와준다는 말을 불신하는 생각이 있었나봐요. 그리고 자기도 완전히 포기 상태죠."

-김성수, 유재건 변호사 아내

반복된 일로 쌓인 불신.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그냥 돌아서지 않았어. 두 사람은 철수를 달래기 시작했어.

"교도소에 가보니 외톨이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저도 당시 (미국) 주류 언론에 있는 유일한 한국 기자여서 스스로 외톨이라고 느꼈죠. 그래서 철수를 만났을 때,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이경원 기자

두 사람은 진심을 담아 설득했어. 한참을 듣던 철수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져. 그리고는 천천히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해. 철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에서 태어났어.

"철수에게 그의 인생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더니 한국전쟁 당시 태어났고 생일이 8월 15일 이래요. 한국의 광복절이죠. 그의 철수라는 이름도 한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에요."

-유재건 변호사

철수는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가, 모르는 남자한테 몹쓸 짓을 당했어. 그렇게 태어난 게 철수였어. 어머니는 그런 철수가 미웠는지, 그 어린 아이를 이모한테 맡기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어.

"한국의 슬픈 역사는 모두 경험한 남자예요."

-유재건 변호사

부모의 결핍으로 불안하고 힘들었을 유년 시절. 그렇게 12살이 된 철수에게 어머니가 다시 나타났어. 그리고 같이 미국 가서 살자고,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온 곳이 샌프란시스코야. 처음 본 미국은 신세계였어. 하지만 그건 화려한 겉모습에 불과했어. 어머니는 낮에는 통조림 공장, 밤에는 칵테일바에서 일했어. 그러니 아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지. 철수는 매일 밤 엄마를 기다렸어. 그럼 철수의 학교 생활은? 지금보다 인종차별이 더 심했던 1960년대야. 지독히도 괴롭힘을 받았고, 참다 못해 싸웠더니, 소년원에 보내더래. 억울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어. 영어를 못했으니까.

한 번은 철수가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서쪽으로 달렸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끝까지 가면, 거기에 한국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얼마나 달렸을까. 바다가 앞을 막아.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해. 성인이 되고난 후에도 철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

"이모하고 살 때가 참 행복했대요. 굉장히 가난했지만, 난 그때 참 행복했다고."

-김성수, 유재건 변호사 아내

철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 변호사는 함께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철수는 "변호사님 억울합니다"라며, 자신이 겪은 4년 전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해.

▲ 4년 전 억울한 누명의 진실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철수는 집에 있었대. 호기심에 동료한테 빌린 권총을 여기저기 만져보다가 실수로 총이 발사됐어.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어. 출동한 경찰한테 실수라고 말하니, 경찰은 총알을 수거해 돌아갔어. 그런데 며칠 수, 경찰이 철수를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한다는 거야. 살인사건 자체를 몰랐던 철수는 깜짝 놀랐어.

알고보니 갱단 간부 입이탁을 살해한 총알, 이틀 전 철수가 실수로 발사한 총알. 둘 다 38구경으로 크기가 같아. 그래서 경찰이 두 사건이 연관됐다고 판단한 거야. 이때만 해도 철수는 별로 걱정을 안 했대. 자기가 죽인게 아니니까.

"저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살인 혐의는 무혐의 처리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오해일 뿐이라고요. 살인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살인 혐의로 기소될 수 있나요? 무죄라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 대한 살인 혐의를 아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이철수

진실이 곧 밝혀질거라 생각한 철수.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아까 그 '라인업' 사진 기억나지? 목격자들 앞에 서라고 해서 섰는데, 주변에 같이 선 용의자들을 보니, 철수 빼고 다 중국인들이야. 그리고 맞은편의 목격자들은, 나중에 알고보니 모두 백인이었대. 사건 당시 교차로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범인을 목격한 시간은 고작 2~3초였어. 백인의 시선에서 동양인을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경향이 있잖아. 동양인을 잘 구별도 못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본 범인을 목격자들이 정확히 짚을 수 있을까.

목격자들은 범인에 대해, '긴머리에, 키는 178cm정도, 동양인 남자, 콧수염은 기르지 않았다'고 했어. 철수는 누가 봐도 콧수염이 있고, 키는 160cm대로 작은 편이야. 그런데 세 명의 목격자가 철수를 지목했어. 경찰은 이 증언을 신뢰하고, 철수가 범인이라 생각했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었어. 하지만 철수는 변호사를 부를 돈도,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어.

라인업이 끝나고 경찰서에 갇혀 있는데 누군가 철수를 찾아왔어. 한국 영사관에서 온 직원이야. 철수는 자기는 결백하다고, 도와달라고 말했어. 그런데, 그 영사관 직원은 "결백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자백이나 해"라며, 무슨 벌레 보듯이 철수를 쏘아보더니 바로 면회실을 나가더래.

"저는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사관이라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고 대한민국 국민인 사람이 저를 이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며 자백을 요구한 후, 그는 저에게 매우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면회실을 나갔습니다. 저는 당황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이 공허하게 느껴졌고, 허위 살인 혐의에 직면한 것은 나 혼자라는 생각으로 면회실을 나왔습니다."

-이철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 증인까지, 철수 빼고 모두 백인이야. 결국 철수는, 종신형을 선고받게 돼. 그렇게 철수는 악명 높은 트레이시 교도소에 수감됐어. 이 곳의 죄수들은 대부분 갱단 출신이야. 심지어 교도소 안에서도 백인, 흑인, 라틴계, 인종별로 갱단을 만들어. 그리고 서로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어. 이 곳에서 딱 한 명의 한국인이었던 철수는, 여전히 혼자였어.

4년 후인 1977년. 철수는 교도소 운동장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어. 그런 철수를, 모리슨 니덤이라는 이름의 죄수가 쳐다봐. 백인 갱단 출신이야. 그는 유색인종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며, 백인우월주위에 사로잡힌 위험 인물이야. 철수가 장기판에서 일어서 농구대 쪽으로 가자, 모리슨도 철수를 향해 다가가. 한 교도관 귀에 "해치울 준비 됐지?"란 소리가 들렸어. 교도관은 감시탑 근무자에게 이 상황을 알렸어. 그런데 모리슨이 더 빨랐어. 철수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꽉 잡아. 철수는 빠져나가려 했지만 키나 체격이 비교가 안돼.

교도관이 떨어지라고 소리치자 두 사람이 떨어졌어. 그런데 모리슨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철수는 체포됐어. 몸싸움을 하던 철수가 모리슨이 갖고 있던 칼을 빼앗아 찌른 거야.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정당방위인데, 모리슨은 현장에서 사망했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철수가 이번엔 진짜로 사람을 죽인거야.

부활한 사형법에는, '두 번의 1급 살인을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됐어. 이 사건에서 철수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철수는 두 번의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게 돼.

▲ 철수를 믿은 단 하나의 친구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철수를 도울 방법을 찾기로 했어. 그렇게 면회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철수가 자신을 구하고 싶으면 누구를 만나보라고 권했어. 바로 이 사람이야.

란코 야마다. 일본인 이민 3세고, 대학생이야. 철수와는 친구 사이래. 철수한테 친구가 있다는 게 놀랍지? 근데 이 란코라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놀라움은 더욱 커져. 란코는 처음부터 철수의 결백을 믿고, 친구를 위해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왔어. 50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2023년의 란코 씨에게 물어봤어.

"철수가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으로 체포되기 1년 전인 1972년에 그를 만났습니다. 철수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정중했어요.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 외톨이였어요. 친구가 필요해 보였어요. 그래서 친구가 됐죠. 전 당시 여름에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친구 집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어요. 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명단에서 '철수 리'라는 이름을 봤죠. '뭐? 이게 무슨 일이지? 이건 말도 안돼. 내가 아는 철수일 리가 없는데' 그가 대낮에 차이나타운 교차로에 누군가를 죽이러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어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은 아니에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4년전 철수가 체포됐을 때, 란코는 바로 면회를 갔어. '너 범인 아니잖아, 내가 방법을 찾아 볼게'라며 유일하게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란코의 존재는 철수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어. 사실 철수는 란코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대. 그런데 란코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죄 없는 사람이 벌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정의감으로 나선 거야. 그렇게 란코는 혼자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해. 그런데 이게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밤늦게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이상한 술집에 갔죠. 당시에는 그럴 용기가 있었어요. 지금이라면 '아우 미쳤어'라며 하지 않을 일이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상황이 이러니 조사도 쉽지 않아. 다들 갱단이 무서워서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거야. 란코는 변호사를 찾아 다녔어. 그런데 반응이 다 똑같아. 이런 사건은 돈이 많이 필요한데, 수임료는 얼마를 줄 거냐고. 돈이 없다는 걸 알고 다들 거절했어. 그러던 중 이 사건을 맡겠다는 변호사를 만났는데, 착수금으로 3천달러를 먼저 달래. 대학생 란코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 그래도 란코는 포기하지 않았어. 돈이 문제면 모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의지했어요. 제가 아는 모든 친구들에게 10달러만 도와달라고 편지를 썼어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란코는 모금을 위한 댄스 파티도 주최했어. 그렇게 한참 돈을 모으고 있는데, 변호사로부터 수임을 못 하겠다고 연락이 와.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결국 돈 때문이었대. 돈을 준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그러는 사이, 철수의 첫번째 재판이 시작됐고, 철수의 종신형 선고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 란코는 마치 자기 잘못인 거 같아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대.

"전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뒀지?'라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철렁했죠. 매우 충격적이었고요. 저는 그걸 개인적인 실패로 받아들였어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그래서 란코는 엄청난 결심을 하게 돼. '철수를 위해 내가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는 결심이야. 그렇게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던 변호사,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 그런 변호사가 스스로 되겠다고 로스쿨에 들어간 거야. 그 때가 1975년, 사건이 발생한지 2년 후야.

그렇게 시간이 흘러 란코가 로스쿨 졸업을 앞뒀을 때,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 철수가 교도소에서 두번째 살인을 저질렀다는 거야. 란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다시 변호사를 급히 찾아. 그런데 이번엔 착수금만 5천 달러를 불러. 란코가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그 때, 란코에게 전화가 와. 철수한테 듣고 연락했다며, 기적처럼 유 변호사랑 이 기자를 만난거야.

"뭔가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엔가 좋은 일들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 같아요. 유재건 변호사는 남들보다 호감 가는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경원 기자는 의욕적이고, 맹렬하고 투지가 넘쳤죠. 이 모든 다양한 힘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했던 거죠. 혼자만 앞선다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극적인 순간에 만나게 된 세 사람.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친구 란코, 애타게 찾던 변호사, 여론을 불러일으킬 베테랑 기자까지. 세 사람의 목적은 단 하나, '철수를 구하자'야.

▲ 들불처럼 번진 '이철수 구출작전'

란코는 두 사람에게 그동안 철수를 위해 쌓아온 이야기를 들려줬어. 란코가 알아낸 것들 중에는 결정적인 게 있었어. 란코가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는 진짜 목격자를 찾았던 거야. 그 목격자는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봤고, 심지어 누군지도 알아. 살해된 입이탁의 부하 중 한 명이래. 하지만 그 목격자는 혹여 보복을 당할까봐 증인으로 나서길 꺼려했어. 그렇게 란코는 중요한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에도 얘기할 수 없었어. 근데 이제는, 같이 고민해줄 친구들이 생겼잖아. 이 셋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연구하기로 해. '이철수 구출작전'이 시작된 거야.

1978년 1월.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철수의 기사가 실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낯선 미국 상황에 던져진 철수의 상황을 빗댄 기사야. 그래 맞아. 6개월간의 취재 끝에 이경원 기자가 쓴 거야. 기사는 재판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조목조목 지적했어. 동양인이라 차별 받았고, 인간으로서 누릴 기본권을 뺏겼다고, 미국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어. 이 기사가 나온 후, 반응이 아주 뜨거워. 철수가 범인인 줄 알았던 한인 교민들도 진실을 알게 됐어. 그리고 "이대로 모른 척 하면 안된다"며 '이철수 구명운동'의 불씨가 댕겨졌어.

기사가 보도되고 한달 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 그레이스 킴 씨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

"새크라멘토와 데이비스에 있는 한국 친구들을 다 초대했어요. 한국 사람은 소수민족 중에서도 소수 민족이잖아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그런 일이 생겼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살인자 누명을 써서 사형을 받게 됐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안된다고 우리가 꼭 살려내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구명위원회를 만들어서 한국의 목소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랬더니 모두 다 찬성을 했어요. 그래서 그날 조직을 했어요. 다 뛰겠다고. 같이 뛰어서 하자고. 그래서 구명위원회 시작을 했어요. 저희 집 리빙룸에서."

-그레이스 킴, 이철수 구명위원회 부회장

미국사회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한인들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순간이야. 새크라멘토를 시작으로 LA, 시애틀, 뉴욕, 하와이 등에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만들어져. 이 기자가 틔운 불씨가 들불처럼 번져갔어.

철수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 "Justice for Chol Soo Lee(철수에게 정의를)"를 한 목소리로 외쳤어. 이 움직임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전해졌어.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총동원돼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럼 한국에서 우리도 해야하지 않느냐. 이런 문제에 우리들이 어머니들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우리도 구명운동을 하자. 석방해야 한다는 단호한 진정서를 보낸 거죠."

-이문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철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늘 어머니의 사랑이 고팠던 철수에게 수많은 어머니들이 생겼어. 심지어 미국에 직접 가서 철수를 만나기도 했대.

"제일 먼저 나를 보고 빙그레 웃더라고요.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어머, 저런 애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지?' 하는 게 제 첫 번째 철수를 본 느낌이었어요. 콧수염이 살짝 났는데 그게 아주 이색적이고. 그리고 싱글싱글 웃는 그 모습이 아주 잘생겼어요. 철수가 '고맙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오셨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인사를 아주 깍듯이 잘하더라고요."

-이문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구명위원회의 활동은 크게 세가지였어. 먼저 '훌륭한 변호인단을 꾸린다'. 유 변호사가 나서서 변호인들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리고 두번째는 '언론을 통해서 철수의 억울함을 알린다'. 이 기자는 계속 후속기사를 쓰며 진실을 말하는데 앞장섰어. 다른 언론에서도 철수의 취재를 시작해. 그때 철수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천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에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든,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가두는 건 정당하지 않아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철수

구명위원회 활동 세번째는 '후원금 모으기'. 란코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을 펼쳐.

"이건 대학생들이 찾고 있었던 주제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철수 사건은 분명히 실재하는 이슈였고, 심각한 불의에 관한 것이었거든요.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죠. 이건 실제 사건이었고 중요한 문제였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유 변호사와 그레이스 킴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어.

"(유재건 변호사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했어요. 같이 전국에 다니면서 대학교, 교회, 한인회, 그런데 다니면서 연설을 많이 했다고요. 연설할 때마다 들고 일어선 거예요 사람들이. 우리도 참여하겠다고. 그래서 후원금이 금방 모였어요."

-그레이스 킴, 이철수 구명위원회 부회장

그런데 구명운동에는 한국인만 참여한 게 아니야. 일본인, 중국인, 필리핀, 심지어 흑인들까지, "Justice for Chol Soo Lee"를 외쳤어. 어느새 이철수 구명운동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범아시아적 인권 운동이 됐어. 그 'The Ballad Of Chol Soo Lee(철수의 노래)'라는 노래가 이때 만들어졌어. 미국 전역에서 철수의 자유를 위한 노래가 울려퍼졌어.

▲ 드디어 받아낸 '무죄'

드디어, 1978년 10월 27일. 구명위원회는 재심 신청을 하고, 이철수를 다시 재판해달라 요청했어.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인권변호사 레너드 와인글래스도 함께 했어.

이 재심 신청,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언론에서 가능성을 '만분의 일'이라 표현했어. 재판을 뒤집을만한 확실한 증거, 결정적인 증인이 있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대.

변호팀은 란코가 찾아냈던, 진범을 안다는 목격자를 '미스터X'라 불렀어. 문제는, 미스터X가 신분을 드러내는 걸 여전히 무서워한다는 거야. 유 변호사와 이 기자가 직접 설득에 나섰지만, 설득에 실패했어. 법정에서 증언하면 자신과 가족이 위험해 진다고.

그러던 어느날, 밤낮으로 서류를 뒤지던 변호팀은 수상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어. '스티브'라는 이름이었어.

"스티브라는 이름이 어떤 서류 한 장의 코너에 적혀 있었던 거예요. '이 이름이 뭐지? 왜 적혀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봤더니 증인이었던 거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사건 초기 제보전화 기록에 적혀있던 이름인데, 사건 조사 중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어. 이 사람이 마지막 희망이야. 주소와 전화번호가 남아있긴 한데, 흐릿 해서 알아보기 힘들어. 와인글래스 변호사는 사립 탐정인 팅크 톰슨 씨에게 사라진 목격자 스티브를 찾는 일을 맡겼어.

한달 후, 새크라멘토 지방법원.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재심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재판이 시작됐어. 그런데 증인석이 비어있어. 변호인 측은 재판부에 "재판 전 증인 신청을 하지 못했지만, 증언대에 결정적인 증인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 부탁했어. 톰슨 탐정이 스티브 찾기에 해낸 거야. 그런데도 변호팀은 일부러 사전에 증인 신청을 하지 않았어. 검찰이 증인을 알면 대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스티브를 증인으로 세웠고, 그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재판을 송두리째 뒤집었어

스티브는 사건 당시 권총을 쏘는 범인을 목격했다고 말했어. 당시 자신과 범인은 3.6m 정도 되는 거리였고, 목격한 시간은 30초~50초 정도 된다고 했어. 그리고 그 범인은 철수가 아니라고 확신했어. 스티브는 기존의 목격자들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범인을 봤어. 변호인단은 이런 중요한 증인이 왜 수사과정에서 빠졌는지, 왜 변호인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문제를 제기했어.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철수를 범인으로 조작했던 정황도 지적했어.

결국, 철수의 재심이 받아들여졌어. 만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해낸거야. 그 후 구명위원회의 구호는 바뀌었어. 'Justice For Chol Soo Lee'에서 'Free Chol Soo Lee(철수에게 자유를)'로.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어. 교도소 살인사건이 재심과는 별개로 재판이 진행됐는데, 정당방위라 주장했지만 철수에게 유죄, 사형이 선고됐어. 재판이 끝난 철수는 사형을 선고받은 자만 수감되는 샌퀸틴 교도소로 이감돼. 얼마 전까지 자유를 눈앞에 뒀는데 또 다시 힘겨운 싸움을 해야하는 거야.

▲ 10년 만에 얻은 자유

1982년. 철수가 수감된 지 9년이 지났어. 지난 9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철수는 이렇게 답했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한편으로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교도소에 갇힌 게 씁쓸하지만, 동시에 매우 감사하기도 합니다. 제 사건이 아시아인 공동체에 경험적 사례가 되었으니까요. 제가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은 그저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아시아인들에게 우리가 원하면 함께 해낼 수 있다는 일종의 교훈을 준 거죠."

-이철수

철수는 아직 용기를 잃지 않고 있어. 얼마 후면 첫번째 살인사건의 재심이 열려. 재심 결정 후 3년이 더 걸린 거야. 그동안 변호인단에 새로운 변호사가 합류했어. 바로 로스쿨을 마친 란코야. 이제 란코는 철수의 변호사야.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재심 판결이 내려지는 날. 법정 안을 120명의 교포가 가득 메웠어.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 청바지 입은 청년들까지. 긴장된 표정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 12명의 배심원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왔어. 배심원 평결은, 만장일치 돼야해. 의견 일치를 보는데 3일이나 걸렸어. 그렇게 나온 결과는, 철수의 '무죄'였어. 재판이 끝난 후, 100명이 넘는 한인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애국가를 불렀어.

"사건에 착수하고 거의 5년 만의 일이니 머릿속이 텅 비더군요. 하지만 당연히 뛸 듯이 기쁩니다. 기자라면 누구나 자부심을 느낄 결과죠."

-이경원 기자

"불가능을 이겨냈어요. 다들 펄펄 뛰며 소리 질렀죠. 법정도 난리도 아니었어요. 정말 전율이 흘렀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이자 변호사

란코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이번 재판의 승리가 나의 20대 시절 중에서 가장 크고 멋진 일입니다"라고 말했어.

하지만 철수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어. 두번째 사건의 재판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직 넘어야할 고비가 남아있어.

"중요한 승리였지만, 만감이 교차했어요. 제대로 축하할 시간도 없었죠. 두번째 옥중 사건 재심을 할 걸 알았으니, 다시 그 재심 준비를 해야 했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이자 변호사

구명위원회는 촛불시위를 시작해. 애초에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면, 옥중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어. 한겨울 추운 날씨에도 거리에 나서 서명운동을 벌였어.

1983년, 두번째 사건 항소심이 열려. 교도소에서 일어난 칼부림을 두고, 살인이냐 정당방위냐 따지다가 1심은 사형이 선고됐지. 그런데 2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다'라고 나왔어. 무죄는 아니고, 원심 파기야.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린 거야. 재판을 다시 시작해야 해.

무죄는 아니지만, 철수는 이제 사형수가 아니야. 보석금을 내면 밖으로 나갈 수도 있어. 근데 보석금 금액이 무려 25만달러야. 당시 법정 최고 금액이었대. 그 보석금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마련됐어. 일단, 유재건 변호사가 본인의 집을 담보로 맡겼어.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집이야.

"만약에 철수가 도망가든지 범죄를 저지르면은 이 돈을 못 받잖아요. 집을 뺏기잖아요. '집이 위험한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래서 '난 철수를 믿는다' 그렇게 얘기했죠."

-김성수, 유재건 변호사 아내

그리고 또 다른 사람도 집을 담보로 맡겼어. 바로 란코의 부모님이야.

"부모님께서 보증금을 위해 집을 담보로 내놓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 지금 제가 집을 갖고 보니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 알겠더라고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이자 변호사

1983년 3월 28일, 철수는 마침내 석방돼. 반쪽자리 자유이긴 하지만, 무려 10년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야.

"여러분이 보낸 지지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새크라멘토의 유재건 변호사님에게요. 오늘 제가 자유를 되찾도록 지지하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방 당시 이철수

철수는 유 변호사, 그레이스 킴, 란코 등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사람들과 포옹하며 감사인사를 건넸어.

"이게 네 인생이라 말해줬어요. 부담도 없고 저주도 없죠. 그저 네가 누릴 인생이라고 했어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이자 변호사

이후 검찰은 두번째 살인사건에 대한 형량 협상을 제안했고, 철수는 받아들였어. 그렇게 철수는 우발적 살인을 인정하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어. 무려 10년 2개월만이었어.

▲ 끝나지 않은 비극

차별과 저항의 상징 철수. 그렇게 교도소를 나와 꽃길만 걸었을까? 안타깝게도 오늘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야. 철수는 자신을 애써준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했어.

하지만 철창 안에서 보낸 10년은 영혼이 망가지기 쉬운 상황이었어.

"그렇게 오랜 감옥 생활을 한 사람이 현실에 나와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얘기는 제가 많이 들었어요. 근데 철수도 그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영웅처럼 막 띄워주다가 탁 끝나고 나니까 그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김성수, 유재건 변호사 아내

철수는 일자리도 갖고 사회에 적응해 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어. 처음 미국에 왔던 12살 때처럼 세상 모든 것이 낯설었어.

"철수가 성인이 되고 모든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니. 마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전혀 없는 빈 공간과 같았겠죠. 철수에게 우정과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죠."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게다가 철수는 차이나타운 갱단이 언제 보복할지 몰라서, 늘 불안하게 지냈대. 철수 스스로도 답답했을 세상과의 거리. 결국 철수는 술과 마약에 빠지고 말아. 그의 방황은 그를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상처가 됐어.

근데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철수는 범죄현장에서 얼굴과 몸 전체에 큰 화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게 돼.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망가지게 된 철수. 철수의 방황은 그제야 멈췄어.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 인생을 살펴보면 원하지도 않은 고통을 무던히도 겪어야만 했던 한 남자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경원 씨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통해 결핍의 고통에서 인류애가 자라더군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인성을 갖게 됐고요. 그들이 아픔을 느낄 때요."

-이철수

그 후 철수는 남은 생애 동안 마약 퇴치 등 사회 운동에 힘썼다고 해. 그리고 2014년 2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끝에는... 그도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이철수 사건은 여러 사람에 영향을 줬어. 이후 미국에서는 이민자가 100명 이상인 학교에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하는 교사를 의무적으로 두게 했고, 소수민족이 재판 받을 땐 인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게 됐대. 철수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로 인해 조금은 좋은 세상이 된 거야.

철수는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았어. 미국 사회에서 차별 받던 소수민족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긴 이철수 사건. 외톨이 철수에게 이런 상징들이, 오히려 구속이 아니었을까.

"철수 사건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끊임없이 고심했으며 워낙 이 모든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냥 이게 제 삶이었죠... 철수는 평생의 친구였어요."

-란코 야마다, 철수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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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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