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살’ ‘닭장’ 건축에 환멸 느낀 2030, 英 천재 건축가에게 열광하다
오세훈·정의선 등 정·재계 인사들도 방문해 문제의식 공유
(시사저널=오종탁 기자·이동혁 인턴기자)
"평균수명 30년짜리 건물을 짓는 것, 지루한 건물을 다른 지루한 건물로 대체하는 걸 멈춰야 한다."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천재 디자이너 겸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서울 전시를 통해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6월29일부터 9월6일까지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전(이하 《헤더윅전》은 헤더윅이 이끄는 헤더윅 스튜디오의 대표작 30점을 드로잉과 아이디어 모형, 테스트 샘플, 건축모형, 현장 사진, 영상 등으로 소개했다. 헤더윅은 《헤더윅전》 개막 전날인 6월28일 전시장에 얼굴을 비춘 후 다른 작품 활동을 위해 한시바삐 출국했다. 그러나 헤더윅이 없어도 그의 작품들은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하며 한국 건축계와 전시계를 뒤흔들었다.
하루 1000명 넘게 찾아… 80%가 20~30대
헤더윅 스튜디오는 '씨앗 대성당'으로 불린 2010년 중국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을 비롯해 2012년 영국 런던올림픽의 꽃잎 모양 성화대, 2015년 새롭게 선보인 영국의 빨간 이층버스, 2019년 미국 뉴욕에서 개장한 벌집 모양 건축물 '베슬', 기둥 꼭대기마다 나무를 둔 상하이 다목적 복합단지 '1000 트리즈', 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올해 완공 예정인 구글 신사옥 '베이뷰' 등 기존 틀을 깨고 인간의 감성을 깨우는 프로젝트들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헤더윅은 6월 방한 당시 헤더윅 스튜디오를 "새로운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기저에는 현대 건축이 이용자의 감성을 고려하지 않고 건물의 지속 가능성도 등한시한다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을 모아 상호작용하게 하고 함께 희망을 품게 하는 건축물을 세우는 게 헤더윅 스튜디오의 목표다.
국내 현대미술 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는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헤더윅 스튜디오의 인사이트가 한국에 큰 자극제가 되리라 봤다. 닭장처럼 빡빡하고 특색 없는 대다수 건물과 초고층 랜드마크 타령, 재개발·재건축 광풍에 최근 사회를 달구고 있는 '순살(보강철근 누락) 아파트' 논란까지, 한국 건축계가 총체적인 위기에 놓여 있어서다. 숨 프로젝트의 예상은 적중했다. 《헤더윅전》의 일평균 방문객은 평일 1000여 명, 주말 1500여 명에 이르렀다. 건축 전시로선 이례적인 대성황이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등 명사도 대거 전시장을 다녀갔다.
9월 3일과 6일 두 차례 찾은 전시장에는 개장 때부터 생긴 입장 대기 줄이 줄어들 새도 없이 끊임없이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처음 준비된 도록 1000부는 일찌감치 다 팔렸다. 구입 문의가 끊이지 않자 숨 프로젝트는 부랴부랴 3000부를 추가로 인쇄했다.
"도심 속의 자연을 구현한 건축물입니다. 드넓은 부지에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있다 보니 야경이 정말 예쁜데, 한 번 보시겠어요?" 《헤더윅전》 도슨트(전시 해설자)가 '1000 트리즈' 건축모형 앞에서 태블릿PC에 담긴 사진을 보여주자 관람객 60여 명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루 4~5차례 진행한 도슨트 프로그램은 전시장 방문의 또 다른 묘미였다. 도슨트들은 작품 자체는 물론 작품을 둘러싼 배경지식과 헤더윅의 이력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며 관람객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관람객들은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공존하다 △조각적 공간 △도심 속의 자연 △감성의 공유 △과거를 담은 미래 △사용과 놀이 △샘플과 스케치 등 7개 전시 공간을 둘러봤다. 다들 디테일 하나라도 놓칠세라 유심히 작품을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일부 관람객이 도슨트에게 질문세례를 퍼붓느라 다음 섹션으로의 이동이 지연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헤더윅전》 관람객의 80% 이상은 20~30대였다고 숨 프로젝트 측은 전했다. 힙한 트렌드에 열광하고 환경과 정의 등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MZ세대가 《헤더윅전》의 흥행을 견인한 셈이다. 가치소비(충분히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상품에 대해 과감하게 소비하는 성향) 요건이 충족되니 적지 않은 푯값(2만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옛 서울역사라는 고풍스러우면서 색다른 전시장도 전시의 정체성과 딱 맞아떨어졌다. 전시 스태프 방지환씨는 "국내에서 건축과 조형에 관한 전시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헤더윅전》이 젊은 세대에게 새로움과 힐링을 동시에 주면서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순살' '닭장' 건축 벗어나야"
실제로 전시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거침없이 한국 건축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박준서씨는 "어디를 가나 건물이나 공간의 밀도가 높아 갑갑하다. 헤더윅 작품처럼 자유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주변에서도 좀 보고 싶다"면서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주변 환경과도 자연스레 어울리는 건축물이 만들어지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준영씨도 "경제적이고 기능적인 측면만을 추구하는 건축 일색"이라며 "하루아침에 바뀌기 쉽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축물이 늘어나길 기대한다"고 했다. 이하경씨는 "건물을 빠르게 짓는 데(공사 기간 단축) 매몰돼 있어 순살 아파트 같은 어이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나.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튼튼하고 안전한 건물을 짓는 게 중요하다"면서 건축계의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관람객 중에는 외국인도 적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는 크리스틴은 한국 건축물이 삭막한 고층 아파트로 대변되는 점을 언급하며 "한정된 도시 공간 내에 사람들이 급격히 몰린 탓에 고층 주택은 불가피한 선택이겠으나, 수직적인 공간 속에선 서로 간 생활이 단절될 수 있기에 지면과 수평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확장해 가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미국인 케네스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선 건축 설계 단계부터 삶의 질을 높일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헤더윅전》의 성공 요인에 관해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는 "한국의 경제 수준이 올라가고 K팝, K드라마 등의 인기에서 볼 수 있듯 문화적 영향력도 부쩍 커졌지만, 유독 도시 고유의 특징을 나타내줘야 할 건축물은 천편일률적이고 이용자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며 "건축이 환경문제나 반사회적 범죄 발생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헤더윅의 지적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 헤더윅 "기후위기와 반사회적 범죄도 건축과 연관"
《헤더윅전》 기획사 숨 프로젝트는 전시장 2층에서 토머스 헤더윅의 강연 영상을 계속 상영했다. 관객들에게 전시 목적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헤더윅은 강연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특색 없는 건물에 둘러싸여 간다"며 "주변에서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은 비슷비슷하다. 곧고 빛나고 평범하고 단조롭고 지루하고 활기나 인간미는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건축은 건물의 형태보다 기능이 우선이라는, 이른바 기능적 측면을 내세우는 동시에 '추가적인' 작업은 유치하고 쓸모없는 장식으로 치부한다"고 덧붙였다.
헤더윅이 말하는 추가적인 작업은 건물에 감성을 더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건물이 지니는 의미가 바로 감성이다. (감성을 더한) 건물은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서로 연결해 준다"며 "감성이 매우 중요한 기능임에도 건물을 올리는 과정에서 비용과 시간, 규제 등의 거센 압박에 밀려 간과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헤더윅 스튜디오를 포함한 소수는 건축에서의 감성을 이해하고 고심하고 있다고 헤더윅은 전했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건축물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을 표방한다. 사람들이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쐬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공간을 최대한 개방하고 인접한 곳과 연결하는 등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구글 신사옥 '베이뷰'와 싱가포르 난양이공대 '러닝 허브', 영국 리즈의 자선단체 '매기스 요크셔'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시야를 넓히면 반사회적 범죄, 기후위기 등 더 심각한 문제들이 건축과 연관돼 있다고 헤더윅은 설명했다. 헤더윅은 "여러 연구는 도시의 건물이 우리를 해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정신 건강에 좋지 않고 건물 주변을 지날 때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쳐 그런 건물 안에서는 병의 회복에도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반사회적 범죄와 모방 범죄의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등 사회적 문제 역시 (건축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회를 향한 적대감이나 남에 대한 분풀이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때리는 '묻지마 폭행' 사건이 전국에서 매일 3건씩 발생하는 한국 사회에 서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후위기와 관련해 헤더윅은 2019년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자동차와 항공기가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2.1%가 항공기에서 배출되는 사이에 건설 산업에서는 38%가 배출된다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해마다 미국에서 약 1억㎡(약 3000만 평)의 건물이 철거되고 다시 지어진다. 이는 워싱턴DC만 한 도시 하나를 부수고 다시 짓는 것과 같다"면서 "이런 일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난다"고 고발했다.
영국의 상업용 건물 평균수명은 40년이고, 한국은 이보다 적은 30년으로 헤더윅은 추산했다. 한국 아파트 수명도 평균 30년 남짓에 불과하다. 이마저 재개발·재건축으로 재산을 증식하려는 욕구가 더해져 끊임없이 하방 압박을 받는다. 평균수명 30년짜리 건물을 짓고, 지루한 건물을 다른 지루한 건물로 대체하는 행위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헤더윅은 일갈했다. 헤더윅은 "사람들이 건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를 철거하려는 경향이 크다"며 "감성이 담겨 1000년 넘게 사람들 곁에 머무를 건물을 짓는 건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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