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만[살며 생각하며]
정년 법관제, 전관예우 방지책
前官 배출되지 않는 구조 확립
법관, 권력에 편승하지 않아야
‘유권무죄 무권유죄’ 사전 차단
판결문이 실시간 공개되는 날
온갖 소문의 벽도 사라질 것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나오고 초 단위로 디지털 혁신이 일어나는 오늘날 법관과 국민 간 소통을 가로막는 소문의 벽이 있다. 소문은 사실 기반일 수도 있지만, 대개 왜곡된 내용이 확대 재생산돼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소문의 벽을 한 칸이라도 들어내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전관예우
사건 당사자는 명의에게 특진을 신청하듯이 전관 출신 변호사를 찾곤 한다. 전관이 숙련된 의사처럼 재판 경험의 합계가 많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숙달된 전문가이기에 패소 가능성이 큰 사건은 선임 단계에서 수임을 거절하면서 재판 승률을 높이기도 한다. 이치가 이러니 승소율이 높아지고 주위에 실력 있는 변호사로 회자되기 쉽다. 언론 등에 의해 소문이라도 나면 사건 당사자는 전적으로 전관의 힘을 신뢰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사건 수임의 순환 구조가 생긴다. 사건 브로커들이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유포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지금도 법관 사회에 전관예우 현상이 만연할까. 지난 35년간 1만 건이 넘는 판결을 선고했지만, 전관예우를 기준으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혹자는 ‘전관 학대’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전관예우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 전관 수임 사건을 더 엄격히 판결하는 움직임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전관예우가 잘못된 것처럼 전관 학대도 바른 처사는 아니다. 법관은 오로지 법리와 증거에 따라서 재판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대부분의 재판 실상을 자세히 보면, 대개의 전관 선임 사건의 경우 전관예우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길 만한 사건을 선임하여 능숙하게 사실관계와 법리를 주장하고 치밀한 증거 제출로 입증에 성공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승소함에도 환영 같은 신기루를 다들 믿는다. 이 신기루는 전관이 배출되는 구조에서는 아마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평생(정년) 법관제가 정착되면 서서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대책은 전관이 배출되지 않는 구조로 가는 것이다. 법관의 처우를 선진국 수준으로 하고, 정년 법관제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퇴직한 법관을 시니어 법관이나 상임 조정위원 같은 공적인 업무에만 종사하게 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이런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는 것은 전관이 배출되지 않는 구조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연방법관(수정헌법 제3조 법관)은 종신제여서 전관이 배출될 여지 자체가 없다.
▨원님 재판(포청천 재판)
재판 당사자는 변론주의나 당사자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들은 법정에서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네가 안다”라고 주장한다. 판사는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인이 아니다. 판사는 그들만의 과거 사실관계를 잘 알기가 어렵고, 오직 주장과 증거에 따라 과거 사건의 근사치를 볼 뿐이다. 메모 한 장이라도 제대로 기록했다면, 다툼 자체가 생길 수가 없는 사건도 허다하다. 사건이 끝날 때마다 패소한 이들의 비난은 모두 판사 몫이다.
사법부의 재판 작용은 행정부의 급부행정과는 다르다. 재판에서는 항상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대방이 있다. 모든 재판 사건은 ‘원고 대 피고’ ‘검사 대 피고인’ 등 팽팽한 제로섬 대결 구조로 진행된다. 각자가 자기와 소송대리인의 책임 아래 최선을 다해 주장·입증해서 법관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승소하고, 무죄도 선고받는다. 그것에 실패하면 패소와 유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대사회에서 권세나 재력이 있는 거물급 인사들도 범법행위를 저지르면 교도소에 간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유전무죄를 일각에선 사실처럼 생각한다. 이런 소문이 생긴 것은 잘못된 과거 역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 형사 범죄는 금전 합의 등으로 형량이 조절되기에 재력가에게 유리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재력과 권력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소수의 사건 때문에 다수의 사건이 드러나지 않아 모를 뿐이다. 법관의 책임감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우리 사회의 주류 정신으로 자리 잡을 때 이 소문도 종식될 것이다.
요즘 ‘유명무죄 무명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말도 들린다. 법관은 권력에 편승해서도, 재판의 기준을 스스로 굽혀서도 안 된다. 보수·진보 같은 이념이나 정치 논리가 아니라, ‘헌법과 헌법정신, 법률, 확립된 판례, 독단 아닌 공평한 정의감, 확고한 소명 의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여론이나 국민정서법으로 포장된 압박이나 인터넷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신독하면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법관의 본질적이고 중요한 점은 본연의 임무인 공정하고 올바른 재판을 하는 것이다. 법관에겐 정년이 있지만, 판결은 영원히 역사 앞에 남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법복을 입는 순간 자신의 명예는 멍에처럼 지고 가는 것이 법관의 숙명이라 생각한다.
판결문도 속히 전면 공개돼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 등 관련법 개정안이 수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판결문이 적절한 과정을 거쳐 실시간으로 모든 국민에게 공개되는 그날이 오면 여러 소문의 벽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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