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아이돌 덕목'에 숨막히는 연습생들…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남자 [실패연대기]
아이돌·연습생 130여 명, 1,000여 회 상담
“데뷔 이후도 따라오는 실패의 두려움...
‘그래도 괜찮아’ 내면의 힘 발견에 동행해”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K팝의 경쟁력은 사람이고, 레이블의 본질은 크리에이터의 영혼”이라고 했다. 이 명제는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 걸까. 2017년 종현, 2019년 설리와 구하라, 올해 문빈까지, 반짝이던 별들의 잇단 죽음은 우리를 자문하게 만들었다. ‘아이돌’이라는 휘황한 이미지 뒤에 웅크리고 있었을 그 ‘사람’은 어땠던 걸까, 그 ‘영혼’엔 어떤 상처가 있었던 걸까.
그 답을 찾으려면 연습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돌은 ‘만들어진다’. 그 시작이 연습생이다. 아이돌 산업이 낳은 특수한 직종이다. 연습생들의 마음과 4년째 함께하는 상담심리전문가 조한로(39) 마음심리상담연구소 대표는 “연습생들은 일반 청소년으로 치면, 매달 수능을 치르는 ‘고3’이나 마찬가지”라며 “심지어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데뷔라는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지만, 결정권은 오롯이 소속된 기획사가 쥐고 있다. 10년을 연습생으로 버티고도 데뷔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연습생들이 겪는 불안은 마치 낭떠러지에서 한쪽 발만 딛고 있는데 땅이 뒤흔들리는 상태와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10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데뷔라는 목표에 쏟아붓고, 20대 초반에 결판 내지 못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구조. 10대부터 남이 보는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도록 훈련 받는 시스템도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의 역할은 연습생이나 아이돌이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내 삶은 괜찮다. 내일도 오늘처럼 흘러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회복하도록 말이다.
공교롭게 그 자신도 20대 초반 뮤지션을 꿈꿨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포기 뒤에 돌아온 건 한껏 움츠러든 자신이었다. 충북 괴산의 한 문화·예술 교육 공동체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 시간이 삶을 바꿔놨다. 어르신과 청소년을 상대로 수업을 하면서다. 신뢰가 쌓인 관계 안에서 서로의 성장을 목도하는 기쁨을 알게 되면서 상담사라는 진짜 길을 찾았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일 때 그의 활동명은 ‘소울 스트리트(Soul street)’였다. 20년이 지나 지금 그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거리 한복판에 서 있다.
[실패①] 연습생은 실패의 최전선에 있다
그는 상담심리사 1급,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청소년상담사, 범죄심리사 1급의 자격이 있는 상담심리 전문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의 위탁으로 2020년부터 연습생과 아이돌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아이돌 특히 연습생 상담을 많이 해왔는데, 일반 상담과 차이가 있나요.
“상담은 본래 비밀 보장이 아주 중요한데, 아이돌이나 연습생은 그 부분이 훨씬 커요. 연습생이지만 계약된 기획사가 있으니 신분이 회사원과 비슷하거든요. 상담 내용이 혹시라도 소속사에 전달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큰 거죠. 신뢰부터 다져야 비로소 상담을 할 수가 있어요.”
-연습생들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성이 있나요.
“아이돌에게 흔히 요구되는 덕목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성실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모습 같은. 그 덕목을 중심으로 연습생 때부터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를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면이 있어요. ‘내가 보는 나’보다 ‘남에게 보이는 나’를 더 신경 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죠.”
-특히 연습생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 같아요.
“과거에 영재들 심리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압박 상황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연습생들은 20대 초반까지 데뷔하지 못하면 끝이라고 여기거든요. 빠르면 10세 무렵부터 인생을 거는 거예요. 이루고 싶은 욕망이 클수록 좌절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죠.”
게다가 연습생은 보통 댄스, 노래, 자기표현 같은 다방면에 걸쳐 다달이 월말 평가를 받는다. 그게 쌓여 데뷔조가 만들어진다. 데뷔조에 들더라도 데뷔 여부는 불확실하다. 상시적인 평가와 피드백,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연습. 이 정도면 불안감이 없는 게 신기할 상황이다.
-그러잖아도 처한 상황이 특수한데 사회적 가면까지 써야 하는 처지이니 마음 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요. ‘누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겠어. 내 어려움을 상담사라고 알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가 나의 불편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누구나 두려운 일이거든요. 그래도 상담을 하러 왔다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온 것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담자가 자신이 지닌 힘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거죠.”
-연습생들은 어느 정도로 데뷔에 몰두하나요.
“빗대자면, 끝을 모르는 고3 시절을 보내는 것 같죠. 그런데 수능을 달마다 봐요. 연습생들은 ‘아, 싫어’ ‘이거 안 할래’가 없어요. 그렇게 하지 못해요. 상담 받으러 오는 연습생들은 이미 그 생활을 한 지 어느 정도 된 경우거든요. 대부분 목숨 걸고 해봐야겠다고 결심한 이들이죠.”
-연습생들이 느끼는 실패에 대한 불안이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열 가지 평가 항목 중에 한 가지를 못했다고 쳐요. 그럼 ‘그 여러 개 중 하나를 못했을 뿐이야’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는 실패했어. 내 존재는 무가치해’ 이렇게 느끼기도 해요. 그 모든 걸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불안이나 좌절감을 상담으로 어떻게 이끌어주나요.
“먼저 충분히 얘기를 들어요. 그 마음을 만나야 하니까. 아이돌 육성 시스템 자체가 자신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건 이미 연습생들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여기서 뭔가 이루고 싶으니 선택했거든요. 그러니 불안을 느끼게 하는 요소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그걸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도록 돕죠. 설사 평가가 좋지 않더라도 그간 내가 한 노력은 없어지지 않고 내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회복 탄력성도 그런 내면의 힘에서 나오고요.”
-아이돌이란 직업은 어린 나이에 본래의 자신보다 남이 바라보고 좋아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각시켜야 하는 모순적인 일이잖아요. 심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데뷔 이후까지 영향을 미치죠. 데뷔 초반엔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있지만, 본래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에 괴리가 생기거나 커지면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끼거나 괴롭기도 하죠. 데뷔 전에는 데뷔에 대한 불안감인데, 데뷔 이후엔 또 다른 불안이 몰려오죠.”
-데뷔 이후에 오는 불안은 어떤가요.
“실전의 불안이죠. ‘더 잘할 수 있을까’ ‘1등 할 수 있을까’ ‘신인상 탈 수 있을까’ 이런 압박감. 데뷔 전엔 회사 안에서 느끼는 불안이었다면, 데뷔 이후는 사회로 나와서 느끼는 불안이죠. 상담에선 그런 압박감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요. 본래 내가 가진 목표는 무엇인지, 이 일이 내게는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해보고요.”
[실패②] 실패도 인생의 힘이다
-연습생이나 아이돌은 심리적 어려움이 생겨도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드물 것 같아요.
“그걸 표현할 대상이 있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해소가 돼요. 그런데 친구나 부모가 있어도 연예계의 생리를 잘 모른다면 말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상담이 그들에겐 소중해요. 상담 시간에 안전함을 느끼면서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고, 온전히 이해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일주일 내내 상담 시간만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어요.”
-아이돌 자살 사건이 있을 때엔 영향을 크게 받을 듯해요.
“실제 연습생 상담도 많이 늘어요. 이미 상담을 받고 있는 연습생이더라도 그 사건을 주제로 얘기하기도 하고요. 상담 자체가 애도의 과정이 되기도 하죠.”
-어느 정도의 충격으로 받아들이나요.
“동료의 사건인 거죠. 그러니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일반 대중보다 심리적 거리가 훨씬 가까우니까요.”
-상담이 연습생이나 아이돌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요.
“상담은 지금 느끼는 마음의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충분히 표현하고 해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온전함을 느끼고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에요. ‘실패하면 끝장이야’에서 ‘실패할 수도 있지’ 혹은 ‘이 실패가 내게 주는 게 뭘까’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여정을 함께하는 일이죠.”
연습생 상담 해마다 느는데, 올해 예산 절반 ‘뚝’
연예인·연습생 심리상담 사업은 한국콘텐츠진흥원 공정상생센터가 2011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대형 기획사는 자체 심리상담 프로세스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 기획사들에겐 콘진원의 심리상담 프로그램이 버팀목이다. 기획사나 개인이 신청하면 1인당 12회까지 무료로 상담이 지원된다.
유명 아이돌의 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연습생이나 아이돌의 심리 지원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연간 상담횟수가 전년 902회에서, 2,612회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참여 인원도 176명에서 661명으로 뛰었다.
올해엔 사정이 달라졌다. 2022년 5억 원이던 관련 예산이 2억 9,000만 원으로 삭감되면서다. 7월 말 이미 올해 상담 한도가 다 찼다. 상담 수요는 훨씬 늘었는데, 예산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콘진원이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상담을 받은 연예인·연습생 26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상담 내용은 ‘불안’이 21.53%로 가장 많았다. 불확실한 미래, 미진하게 느껴지는 실력,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 불안이다. 결국 그건 ‘실패에 대한 불안’으로 압축된다.
-심리적 위기는 어떤 경우에 오게 되나요.
“고립감을 느낄 때가 커요. ‘내가 이렇게 힘든 걸 다른 사람은 모를 거야. 나만 이렇게 힘든가. 주변 사람들은 잘 버티고 있는데’라는 생각에 매몰되면 얘기하지 못하게 되고 해소할 창구가 없어지니 고통은 더 심해지죠."
-끝내 데뷔하지 못한 연습생도 만났을 것 같은데, 그런 때 심리적 상태는 어떤가요.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이죠. 준비한 이별이 아니거든요. 갑자기 오게 되죠. 데뷔조에서 최종 탈락하거나, 일방적인 계약 종료 같은 외부 힘에 의해서 이 길이 끝나는 거예요. 연습생 입장에선 지금까지 인생의 3분의 1 혹은 절반을 바쳤거든요. 게다가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이 회사에 로열티(충성도)도 생긴 상태고요. 이 회사 말고는 갈 데가 없을 것 같고요. 다른 회사에 간다고 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막막하죠. 낭떠러지에 발 하나 걸쳐두고 버티는데 땅이 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스트레스 상황이죠.”
-그런 땐 어떻게 돕나요.
“그 마음을 알아주려고 하고 함께 버티자고 해요. 너무 힘든 상황이면 약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행동요법도 권해요. 명상이나 산책 같은.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을 함께 돌아보죠. ‘처음엔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제 조금씩 버티고 있네. 누워만 있었는데 지금은 산책도 하네’처럼. 이 힘든 시간도 인생에서 분명히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먹구름을 벗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지만, 먹구름 자체도 나의 온전함 중 하나라는 걸요.”
-아예 다른 길을 간 연습생 출신들도 있나요.
“그럼요. 전혀 다른 길을 택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아이들도 있어요. 판단의 주체가 타인이었던 과거에서 완전히 바뀌기도 해요.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란 걸 깨닫고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삶의 생명력을 느끼죠.”
-엄청난 변화네요.
“맞아요. 그 힘이 생긴 걸 본인도 깨달아요. 살면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지만, 스트레스가 오더라도 내게는 이겨낼 힘이 있다는 걸 믿게 되죠. 삶의 관점을 바꾸는 건 큰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말해줘요. 나는 동행했을 뿐, 네가 살아냈고 버텼기에 힘이 생긴 거라고.”
[실패③] 나도 실패한 뮤지션이다
-실패는 자존감을 높이나요, 낮추나요.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렸어요. 실패하면 좌절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그 이후가 중요해요. 이런 말이 있잖아요. 1등 하면 1등 하는 법만 아는데, 2등 하면 1등 하는 법 빼고 다 알게 된다는. 1등 하는 게 성공에는 중요할지 몰라도, 심리적으로 더 성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건 2등 아닌가 싶어요.”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면 내적 성장에 도움이 될까요.
“실패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죠. 너무 빨리 하려고도, 느리게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나의 속도로 바라보길 권해요. 내 삶은 흐르고 있으니까요.”
-대학 때 뮤지션 활동을 했다고요.
“흑인음악 그룹을 했어요. 휴학을 하고 2, 3년쯤 활동했죠. 데뷔한 건 아니에요. 언더그라운드 그룹으로 공연도 하고 음악도 만들었죠.”
-포지션이 뭐였나요.
“랩을 했어요. 작사와 프로듀싱, 믹싱도 했죠.”
-왜 그만뒀나요.
“저 빼고 다 잘하더라고요. (웃음) 저 빼고 다 성장하고요. 그룹 내에서 저만 정체돼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불안이 커졌어요.”
-그런 경험이 연습생 상담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하겠어요.
“연습생들도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때 마음이 어떤지 이해가 되죠. 내 얘기도 해줘야겠다고 느껴지면 털어놓기도 해요. 나는 네 마음을 정말 이해하고 싶으니 내게도 얘기해 달라고.”
[실패란] 실패해도 내 삶은 흐른다
-뮤지션을 꿈꾸다 어떻게 상담사가 됐나요.
“음악을 접고 복학을 했어요. 대학 졸업 뒤에 사회복지학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죠. 이미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다 충북 괴산에 있는 ‘어린이문화사과’라는 공동체에 문화ㆍ예술 교육 계약직 교사로 채용돼서 1년간 일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게 바뀌었죠.”
-어땠는데요.
“지역 청소년ㆍ어르신 교육과 문화 활동을 돕기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사는 공동체였어요. 그때 삶의 관점을 저한테 돌리게 됐어요. 자연과 가까이 살면서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도 이해했죠. ‘해가 뜨는구나, 해가 지는구나, 내일도 해가 뜨겠구나’ 같은 믿음.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삶은 이렇게 흐르고 있겠구나’하고 느꼈죠.”
-상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도 있었나요.
“할머니들 문해 교육을 했어요. 그땐 운전면허가 없어서 2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갔거든요. 수업 준비를 얼마나 빼곡하게 했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이 한 30분은 싸온 음식 드시거나 잡담을 하시곤 하는 거예요.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았죠. 제가 멀리서 힘들게 오니까 숨 돌리라고 그러신 거였어요. 마지막 수업 때는 고쟁이 주머니에서 3만 원, 5만 원씩 꺼내서 주시는데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농협에 돈 넣을 줄만 알았지, 뺄 줄 모르시는 분들이거든요. 그때 관계의 신뢰를 느꼈고, 삶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아이들에게서도 느낀 게 있나요.
“초등학생 대상으로 연극수업을 하고 공연도 했거든요. 돌 역할을 맡은 초등 1학년생 아이가 있었어요. 돌이니까 가만히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 어머니가 객석에서 가만 보니까 아이가 화장실이 급해 보이는 거죠. 제게 큰일이라면서 오셨어요. 저는 바로 무대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와 대화가 가능했거든요. 제가 물어보니까 괜찮다는 거예요. 앞으로 30분은 남았는데 정말 참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데도 참아보겠대요. 정말 이 연극을 함께하고 싶었던 거죠. 아이는 끝까지 버텼어요.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교감을 한 거죠. 그런 게 상담 아닐까 싶었어요.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믿어주는 것, 농사를 짓듯 사람들 마음을 봐주는 것, 그 마음이 성장하는 걸 보는 것, 그게 상담이죠. 상담사야 말로 최고의 직업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실패가 제게 준 선물이죠.”
-상담사로서, 그리고 실패를 해본 사람으로서 실패란 뭐라고 생각되나요.
“실패란 해볼 만한 것, 해도 괜찮은 것.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자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장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패를 바탕으로 얻게 된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그럼에도 내 존재는 온전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상담사 대신 ‘동행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내면의 힘을 회복하고 성장하는 여정을 함께하는 동행자. 인터뷰 때도 그는 동행자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으려 사례는 피하고 본질을 얘기하려 애썼다.
이 미더운 동행자에게 ‘현재가 불안한 연습생이나 아이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불안해도 괜찮으니 함께 버텨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진짜 불안하거든요.”
굳이 상담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동행자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함께’는 때로 사람을 살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주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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