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6. “깨진 집터가 완연하더이다”-여진족 침입 이후 울릉도
■11세기 동여진족 침략 후 우산국 급격히 쇠락
“깨진 집터가 완연하더이다,” 울릉도 사정을 전하는 고려사 고종 30년(1243년)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기록을 더 자세히 옮겨보면, ‘동해 가운데 울릉이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이 산출되지만, 뱃길이 멀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됐다. 최이(무신정권 수장)가 사람을 시켜 섬을 살펴보도록 하니 깨진 집터가 완연했다. 동쪽 군민들을 이주시켜 그곳을 채우도록 했는데, 그 후에 험한 풍파로 인해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이 생기므로 주민 이주를 그만두게 했다’는 내용이다. 깨진 집터가 완연했다는 것은 울릉도가 상당 기간 거주민이 거의 없는 상태로 쇠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1세기 환동해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 동여진족들의 침탈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진족 침입 이후 울릉도는 급격히 쇠락기를 맞게 된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고 살육을 일삼는 무시무시한 해적들의 약탈을 피해 섬사람들이 육지로 도망쳐 나오고, 귀향(歸鄕)조차 여의찮아 육지에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울릉도 거주민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상 먼 바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다 산악 지형 때문에 거주민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동여진족 해적들이 울릉도를 침탈한 것은 그곳의 전략적 가치를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섬 자체가 요새인 곳,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은 단번에 느꼈겠지만, 울릉도는 달리 성(城)을 쌓을 필요가 없는 요새형 섬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성인봉(987m)에서 뻗어 내린 험한 산줄기로 형성돼 있기 때문에 배를 댈 수 있는 공간도 극히 제한적이다. 바다가 거대한 해자 역할을 하고, 바다 위에 불쑥 솟아오른 산악 지형이 성벽 그 자체이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성가시고 힘겹다.
11세기에 장거리 항해를 통해 동해 최남단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함경도에서부터 강원도-경상도 연안지역을 수시로 공격, 환동해권을 거의 전란 상황으로 몰고 간 동여진족들에게도 울릉도는 매우 중요한 중간 거점이 되는 동시에 자칫하면 배후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동해 전역을 효과적으로 약탈하고 등 뒤의 위협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울릉도는 힘들지만,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섬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진족들이 울릉도를 약탈, 피폐 상황으로 몰고 가면서 우산국(國), 즉 역사에서 나라라는 호칭을 사용해 온 울릉도는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지경에 처했다.
■여진족 침략 후 100년 이상 피폐
이 같은 정황은 이후 고려 조정이 여러 차례 울릉도에 보낸 관리들의 보고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의 경우는 여진족의 침탈을 받은 울릉도의 사정을 살펴 보기 위해 인종 19년(1141년)에 사람을 울릉도에 보내 섬의 산물인 과핵(果核·과일 씨)과 목엽(木葉·나뭇잎) 가운데 본토(한반도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이상한 표본을 구해 왕에게 헌납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울릉도가 그전에 신라나 고려 조정에 줄곧 방물을 바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산물이나 농산물도 있었을텐데, 감창사 이양실이 과일 씨와 나뭇잎 등을 임금께 헌상했다는 것은 농·특산물을 쉽게 구할 수 없을 만큼 울릉도의 생활이 여진족 침입 이후 피폐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 이보다 16년 뒤인 의종 11년(1157년)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들어간 내용이 고려사에 전하고 있는데 김유립의 보고 내용은 더욱 많은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사 기록을 살펴보면, ‘왕은 동해 가운데에 우릉도(羽陵島)라는 섬이 있는데, 땅은 넓고 토질이 기름져서 예전에는 주·현(州·縣) 고을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김유립을 파견해 살펴보라고 했다. 그가 돌아와 아뢰기를 땅에 암석이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겠더이다”라고 하니 마침내 그 의논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짧지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왕이 ‘옛날에는 고을(州·縣)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조정이 동 여진족 침입 후 울릉도의 피폐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예전에 주·현이 있었던 상황을 먼저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다고 들었다”고 왕이 말한 것은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정이 어찌 그렇게 되었냐”는 반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유립이 돌아와 “암석이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 적당치 않다”고 보고한 것도 당시 울릉도에 농민 정착민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여진족 침입 후 울릉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침탈을 견디지 못해 강원도와 경상도 일원 육지로 도망쳐 나왔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현이 설치돼 있었을 정도로 많은 거주민이 살았던 울릉도가 이 정도 피폐했다는 것은 여진족들의 울릉도 침탈이 단기간에 그친 것이 아니라 11세기 내내 계속됐던 강원·경상도 등 동해안 침탈과 맞물려 지속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자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글 머리에서 우리는 무신정권 수장이었던 최이가 사람을 보내 섬을 살펴본 1243년 고려사 기록에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됐다. 깨진 집터가 완연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김유립이 울릉도를 시찰한 때(1157년)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뒤에도 울릉도는 거주민이 거의 없는 섬으로 상당 기간 전락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고려 대몽항쟁 전란 중에도 울릉도에 육지 주민 이주 시도
이처럼 쇠락한 울릉도에 다시 이주민들을 보내려는 시도도 계속된다. 김유립의 울릉도 시찰 소식을 전하면서 말미에 ‘그 의논은 중단됐다’고 기록한 내용 중 ‘의논’은 울릉도에 사람을 이주시키는 논의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무신정권 수장) 최이가 동쪽 군민들을 이주시켜 그곳(울릉도)을 채우도록 했다’는 내용은 고려 조정 차원에서 울릉도 이주를 추진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때 다시 울릉도에 들어간 ‘동쪽 군민’은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원의 동해안 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북방에서 일어나 중원을 삼킨 몽골과 사상 유례 없이 길고 혹독한 대몽항쟁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려가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는 등 섬 관리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려사 원종 즉위년(1259년) 기록에는 더 눈길을 끄는 장면이 등장한다. 울진현령 박순(朴淳)이 처와 노비, 가재도구를 배에 싣고 울릉도에 가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때마침 성안에 들어 온 박순을 붙잡아 두자, 뱃사람들이 박순의 가산을 가지고 (울릉도로) 도망해 갔다는 것이다. 현령 벼슬을 지내고 있던 박순이 무슨 연유로 일가를 거느리고 울릉도로 가려고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박순을 붙잡아 뒀다는 것으로 미뤄볼 때 아마도 울릉도를 도피처로 삼으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 울릉도 사정에 밝은 울진현령이 울릉도로 도피하려고 했다면, 그곳으로 갈 경우 육지의 추격과 단속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고려 중·후반기 울릉도는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도해가 어려운 섬이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후 육지 본토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해 온 울릉도가 여진족 침략 이후 철저하게 쇠락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씁쓸하다. 11세기 동해안 전역을 공포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여진족들은 역사를 후퇴시킨 무리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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