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꿈을 키워나간 세 명의 ‘듣보’ 여자들, 다큐를 만들다[플랫]
2018년, 권하정은 영화과를 졸업한 뒤 슬럼프에 빠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던 시기. 하정은 집에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친구 김아현의 단편영화 상영회 초대장이 온다.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거의 1년 만에 집 밖으로 나선” 하정은 상영회에 초청된 무명의 가수 이승윤의 노래와 만난다. 그리고 크게 위로받는다. 승윤의 앨범에 있는 다른 노래들까지 다 찾아 들은 하정은 생각한다. ‘나, 이 가수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어.’
지난 6일 개봉한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학교를 졸업한 뒤 방황하던 ‘듣보인간’ 셋이 역시 ‘듣보가수’였던 승윤의 신곡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하정과 아현, 그리고 또 다른 친구 구은하는 무작정 승윤의 노래 ‘무명성 지구인’으로 샘플 뮤직비디오를 만든다. 집 안에서 미니어처 소품을 활용해 찍은 뮤직비디오 파일을 USB에 담아 손편지와 함께 공연이 끝난 승윤에게 건넨다. ‘혹시 USB를 흘린 게 아닐까’ 생각될 때쯤, 승윤으로부터 장문의 답장이 도착한다. “내내 울다 이제야 답을 드린다”고 시작하는 메일은 “무조건 함께하고 싶다”는 화답으로 끝난다. 단편영화 제작 경험이 있긴 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초보 감독들, 가수이긴 하지만 역시 뮤직비디오 촬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승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승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새 앨범 작업에 몰두한다. 하정과 아현, 은하는 새벽 동대문시장을 뒤져 승윤에게 입힐 옷을 고르고, 밤을 새워가며 소품으로 쓸 석고본 수십 개를 뜬다.
‘성공한 덕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정이 승윤의 노래를 좋아하면서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이들은 ‘팬과 가수’가 아닌 ‘뮤직비디오 감독과 아티스트’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한다. 승윤은 기자간담회에서 “그 당시 뮤직비디오를 만들자는 다른 제안도 받았는데, 묘하게 시혜적인 느낌이 있어 다 거절했다. 보통 제안이 들어올 때 어떤 언어를 쓰는지 보는 것 같다. (권하정 감독은) ‘너의 음악을 위해, 너를 어떻게 해주겠다’가 아니라 ‘다 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무언가 으쌰으쌰하고 싶다’고 말씀해주셔서 신뢰가 갔다”고 했다. 아현은 ‘성덕이 된 소감’을 묻는 한 취재진의 질문에 “입덕한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점도 네 사람이 서로에게 쓰는 언어다. 작업하면서 맞닥뜨리는 어렵고 힘든 순간, 이들은 서로에게 ‘힘을 내’라고 하기보단 그냥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을 담백하게 표현한다. “너희가 있으니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하정), “너네가 이 일을 실현시켜주는 느낌이 들었어”(아현), “정말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에 저와 제 노래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승윤). 이들은 썩 훌륭하게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친다. 그리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열심히 살던 이들이 우연히 만나, 인생의 한 순간을 밀도있게 공유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다. 이후 듣보인간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까? 하정과 아현은 여전히 영상, 영화 일을 하고 있다. 은하는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하자’는 마음을 갖고 빵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승윤은 2년 전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1위를 하면서 더 이상 ‘듣보’가 아니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라는 제목은 하정이 영화 일을 안 하고 쉬던 때, 우연히 만난 학교 선배가 ‘너 영화 안 한다더니 살아있었네?’라고 말한 것에서 착안했다. “나의 생존신고 같은 영화다. 나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뜻에서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는 친구 셋이 만들었지만, 다큐멘터리는 권하정·김아현 감독이 제작했다.
▼김한솔 기자 hansol@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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