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실패 답습 尹 담대한 구상… 양안관계에 新정책 실마리 있다

이규태 前 가톨릭관동대 교수(법학·북한학 박사) 2023. 9. 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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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오그래픽]

● 韓 역대 對北 정책 모두 실패
●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 北 핵보유로 결말
● 北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 낮아
● 민간 중심·정부 지원 기조로 상호관계 패러다임 구축한 양안
● 통일 지향 특수관계→통일 이전 국가관계 전환 꾀해야

2018년 9월 20일 북한 삼지연초대소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오찬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1]
1949년 중국은 내전으로 인해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정권(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으로 냉전적 분단체제가 구축됐다. 한반도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졌고, 1948년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대한민국·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됐다. 1950~1953년 사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냉전적 분단체제가 고착됐다.

이념체제 분단이라는 냉전적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남북한은 1970년대부터, 이른바 양안(兩岸)이라 일컫는 중국·대만은 1980년대부터 교류협력을 기조로 하는 상호관계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양안은 성공했고, 남북한은 실패했다. 남북한 분단체제하에서 상호관계 패러다임 전환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펼쳐온 한국의 대북정책과 접근법이 결국 모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1962년 미국 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S.Kuhn)이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를 통해 제시한 개념이다. 특정한 시기 공인된 인식체계, 이론체계를 의미하는 개념, 가설, 이론, 준칙과 방법의 총화, 즉 공동으로 따르는 세계관과 행위 방식이라고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에 남북관계 패러다임이란 대북정책·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접근 이론과 방법, 각종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북관계 상황을 보면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모든 한국 정부의 대북 접근법, 이론과 정책의 변화, 즉 패러다임 전환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친북적 접근법을 택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패러다임조차 북한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100% 실패했음이 증명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까지 해온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로 끝난 기존 대북 패러다임

2020년 6월 16일 북한은 황해도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사진은 이튿날 노동신문이 공개한 폭파 당시 모습. [뉴스1]
197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남북한은 교류·협력을 위한 166개 협의서를 체결하고 다섯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 '민족자주'와 '민족통일'을 논했다. 하지만 2020년 6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남북관계는 모든 것이 단절된, 적대적 대립 상태인 1970년대 이전 분단체제로 회귀했다.

양안은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부 간 대화·접촉은 중단됐지만, 정당 교류를 포함한 민간 중심의 전면적 교류·협력은 일상화됐다. 중국 측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양안 간 경제교역 규모는 2021년 3283억 달러다. 중국 진출 대만 기업 수도 누적 기준 12만4142개에 달한다. 같은 해 한국의 대중(對中) 교역 규모는 3015억 달러, 누적 기준(2021년 6월 말) 중국 진출 한국 기업은 2만8159개다.

양안과 남북한의 교류·협력 현황을 비교한 '2020년 전후 양안교류현황과 남북한교류현황 비교'를 보면 상호 교류·협력으로 패러다임 전환에 성공한 양안관계, 실패한 남북관계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있다.<표 참고>

진보 정부로 평가받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보수 정부까지 역대 한국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일부 성과를 볼 때도 있었지만 세계 현대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편 교류조차 불가능한 단절이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사업을 제외하면 남북 교류는 모두가 이벤트 성격으로 진행됐다. 일상적 교류는 사실상 논할 것조차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한반도 신경제구상'으로 한반도 비핵화, 남북한 평화체제 수립 및 대북지원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그토록 확신하던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지난해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해'라는 핵무력법을 제정함으로써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담대한 구상'이라는 대북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정부 간 군사통신선조차 단절된 구시대 냉전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됐던 독일은 1970년대부터 교류·협력을 본격화해 1990년 통일을 이뤘고, 양안도 1980년대부터 민간 중심 교류·협력 패러다임 구축에 성공했다. 이와 비교하면 남북한은 1970년대 초부터 50여 년간 노력했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부끄러운 분단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같은 시기, 같은 유형의 정치적 분단체제에서 동·서독 및 양안의 성공을 살피면 바람직한 패러다임 전환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시기 북한과 관계가 일시적으로 개선된 적이 있지만 이 역시 양안의 그것과 같이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실패해 최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의 기존 대북 패러다임은 분명히 실패했다. 이를 전환하지 않고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구축할 수 없다.

"담대한 구상, MB 대북정책 복사판"

지난해 11월 2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윤석열 정부 대북정책 ‘담대한 구상’의 의미와 추진 방향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비핵화 협상으로 나오면 북측이 우려하는 사안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호혜적으로 협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먼저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대북 패러다임을 통해 현황을 살펴보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과감한 친북 정책을 펼쳤다. '판문점 선언' '평양 공동 선언' 등 성과를 보이는 듯했으나 결국 패러다임 전환에 완전히 실패했다. 지난해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비핵화를 전제로 과감한 대북 지원을 추진하겠다는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한반도 신경제구상' 혹은 그 이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재정리한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 구현'이라는 목표와 '일절 무력도발 불용' '호혜적 남북관계 발전' '평화적 통일기반 구축'이라는 3대 원칙 등 북한이 이미 수용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내용을 다시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5대 핵심 추진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비핵화와 남북 신뢰 구축 선순환' '상호존중에 기반한 남북관계 정상화' '북한주민 인권 증진과 분단 고통 해소' '개방과 소통을 통한 민족동질성 회복' '국민 국제사회와 함께하는 통일 준비' 등도 사실 북한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보수 진영으로부터 '굴종'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추진한 친북 정책도 수용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윤석열 정부는 담대한 구상에서 북핵 문제 해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강력한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억제하고(Deterrence), 제재와 압박을 통해 핵개발을 단념시키며(Dissuasion), 외교·대화를 통해 비핵화를 추진하는(Diplomacy) 총체적 접근을 통해 북한 스스로 비핵화 협상에 복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겠다. 북한이 진정성을 가지고 비핵화 협상에 복귀한다면 북한의 민생 재건과 남북 간 신뢰 조성을 위한 초기 조치를 과감하게 추진해 본격적으로 협상 동력을 마련하겠다. 비핵화 현상이 진행되면 포괄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 비핵화'에서 '완전한 비핵화'로 신속하게 나갈 수 있도록 북한 비핵화와 경제·정치·군사적 상응 조치를 동시적·단계적으로 이행하겠다."

북한 지도부는 이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정은 총비서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에서 다음과 같이 윤석열 정부의 패러다임을 맹비난했다.

"담대한 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10여 년 전 이명박 역도(逆徒)가 내들었다가 세인의 주목은커녕 동족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 개방, 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우선 '비핵화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전제임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흥정할 것이 따로 있는 법. 우리의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과 바꿔보겠다는 발상이 윤석열의 푸르청청한 꿈이고, 희망이고, 구상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천진스럽고 아직 어리기는 어리다는 것을 느꼈다.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이뿐 아니라 지난해 9월 8일 윤석열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했지만 이날 바로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라는 최고인민회의법을 제정해 핵보유국 지위와 핵 사용 조건을 구체적으로 법규화했다. 비핵화를 전제로 설계한 '담대한 구상'을 법규까지 제정하며 거부한 것이다.

‘담대한 구상'에서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복귀하게 할 방법으로 제시한 핵개발 억제, 제재와 압박을 통한 핵개발 단념, 외교·대화를 통한 비핵화 추진은 한미동맹의 북핵 억지력을 기조로 북한을 강력하게 압박해 대화로 유도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특히 중국의 적극적 역할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러한 접근법이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북한 정권은 오히려 대북제재를 받는 상황을 핵탄도미사일 고도화와 대내 정치 통제에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지속되고, 한미관계 강화로 인한 한중관계 악화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북한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중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압박 정책을 강화하리라곤 기대할 수 없다. 즉 북한 비핵화를 위한 외교를 추진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서 중국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한미동맹 억지력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 위협 억제'는 가능하지만, '핵개발 단념'을 기대할 수는 없다.

韓 통일 정책 = 체제 위협으로 느끼는 北

2021년 6월 16일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 인공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뉴스1]
이러한 사실은 김정은 정권의 대남정책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부터 김정일 시기로 이어지면서 마련된 '조국통일 3대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과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을 기반으로 하는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연방 형식 통일국가를 지향한다. 이는 '조국통일 3대 헌장'에 잘 설명돼 있다.

북한의 대남 통일 정책은 1960년대 이전 민주기지론(민족해방론)과 무력적화통일론, 1960년대 남북연방제, 1970년대 고려연방제와 조국통일 5대강령, 1980년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으로 변해 왔다. 2005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회담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기본 틀로 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념·체제 차이 극복을 위한 과도적 형태로, 남북한 사이 교류·협력 체제를 만들고 궁극적으론 통일을 추구하자는 의미다.

김정은 체제에서도 조국통일 3대 헌장 내용을 대남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남북한이 민족 대단결로 자주적 통일은 추구하되, 하나의 민족으로서 서로 다른 체제를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가는 정치적 명분일 뿐, 원하는 것은 독립된 두 개의 국가다. '2개의 제도와 2개의 정부'에 방점을 찍는 연방 형식 제도를 추구한다.

김정은 총비서는 이를 "북과 남은 상대방에 존재하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온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연방국가를 창립하는 길"이라며 "‘하나의 민족·국가, 두개의 제도·정부' 대원칙에 기초하되 북과 남에 존재하는 두 정부가 정치·군사·외교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가지게 하고,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내는 방법으로 민족 공동의 이익에 맞게 북남관계를 통일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김일성 정권부터 이어져 온 이 기조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반영됐지만 결국 사문화됐고, 김정일과 김대중 대통령이 발표한 '6·15공동성명'도 유명무실해졌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패러다임도 사실상 생명을 잃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이 합의한 2007년 '10·4 선언'도 빛이 바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합의한 2018년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도 2020년 6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이와 같은 남북 협의의 사문화 과정에서 북한은 남북관계에 대한 남측의 관계 개선 노력, 즉 통일 정책을 체제 안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지한다는 '안전 딜레마'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연방제에 의한 통일이 유일한 평화통일의 길이며 그 외에는 비평화적 통일 방법밖에 없다"며 중국과 유사한, 북한식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강조하면서 제도·흡수 통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즉 김정은 정권은 핵무력으로 강력한 정권체제안보를 유지하면서 두 개의 제도·정부를 유지하는 대남정책 패러다임을 유지하고 있다. 연방제 방식의 민족통일을 위해서 민족 대단결과 민족 공조를 강조하지만 속내는 김여정의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는 말에 가깝다. 3대 세습으로 물려받은 정권을 유지하는 게 우선일 공산이 크다.

현재 남북 분단 상황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요인은 김정은 체제가 스스로,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것이다. 사실상 쿠데타 등 내부 분열로 야기되는 사태가 아니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북한은 핵보유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중국이 대(對)미일 전략 차원에서 북한과 우호관계 및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한, 핵을 보유한 북한의 체제 안전은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2018년 4월 30일 강원 철원군 민통선에 위치한 경원선 월정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경원선은 광복 후 국토분단으로 운행이 중단됐다. [뉴스1]

新남북관계 위한 新패러다임 모색할 때

통일은 남북한이 포기할 수 없는 민족 과제다. 1970년대부터 50년 이상 추진해 온 한국 정부의 '통일 지향 잠정적 특수한 관계' 패러다임을 통한 남북관계 접근법은 북한의 안전 딜레마로 인해 상호 교류·협력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에 유효하지 않음이 이미 증명됐다. 분단 체제가 70년을 넘기면서 남북한은 두 개의 정권·체제로 완전히 고착됐고, 북한 측도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연방주의·신기능주의·제도주의·구성주의적 접근 가운데 어떤 것도 남북한 사이엔 통하지 않았다. 북한이 협력하면 조금 잘되는 것 같다가, 거부하면 무너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남북한이 체결한 모든 협의서는 휴지 조각이 됐고, 상호관계는 단절됐다.

북한이 핵보유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그동안 남북한 사이 '평화'와 '통일 지향의 잠정적 특수한 관계'로 접근했던 각종 형태의 '민족통일 평화 공존' 패러다임은 실패로 끝났다.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첫째, 과거 50여 년간 실패한 상호관계 접근 패러다임을 포기해야 한다. 국민 간 우편교환·전화 통신도 불가능한 채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모든 것이 단절된 남북관계를 새롭게 풀어가려면 과거 50년 이상 시도한 대북 접근 패러다임 실패를 인정하고 더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북한과 '공존·공영'이 가능한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 북한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가장 우선 고려하는 것은 정권 안전이다. 김정은 정권이 원하는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자"는 바람에 맞출 수 있는 패러다임을 명확히 한다면 북한은 공존·공영 관점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위 두 가지 관점에서 불신을 극복할 수 없는 현재까지의 '통일 지향 특수한 관계'에서 '통일 이전 국가관계'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남북한이 강조해 온 정치적·민족적 구호 '민족통일'이 역설적으로 남북한 사이 불신과 투쟁을 조장하고 상호관계 단절을 초래한 패러다임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은 민족통일 대단결을 주창하면서도, 한국이 이를 주장하면 '반(反)공화국 책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70년 이상 두 개의 국가로 체제 분단이 고착한 상황에서 민족통일 대단결은 껍데기와 같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방식 '하나의 민족·국가, 두 개의 제도·정부' 혹은 한국의 통일 지향 잠정적 특수한 관계나 국가연합 단계와 같은 정치적 민족통일을 강조하는 패러다임보다는 남북한 분단체제 현실을 반영한 통일 이전 국가관계로 남북한 사이 패러다임을 전환하면 단절된 남북관계를 타개할 방향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족통일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남기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존·공영'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한국과 북한을 독립적 개별국가로 인정하고 있고, 한국 정부도 사실상 이를 인정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행한 바와 같이 북한 체제를 인정하되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3NO'를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론 민족통일, 통일 준비를 외치는 모순된 패러다임은 의미가 없다. 분단 현실을 기반으로 패러다임 전환에 성공한 동·서독과 양안은 물론이고, 이념보다 현실적 이익을 우선한 한국과 중국, 한국과 베트남의 상호관계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살피면 남북관계 개선 실패 원인과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역대 한국 정부는 통일에 성공한 서독의 동방정책 패러다임을 원용해 통일 지향 잠정적 특수관계 패러다임으로 남북관계 발전을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윤석열 정부도 이 실패한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안관계에서 중국이 '일국양제 평화통일(一國兩制平和統一)'이라는 정치적 논리를 견지하면서도 대만이 주장하는 '통일 전 대만지구(統一前臺灣地區)'와 '대륙지구(大陸地區)' 패러다임 전환을 수용해 민간 중심, 정부 지원을 특징으로 신기능주의적 교류협력 패러다임 구축에 성공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한국 정부도 남북관계에 적용하는 데 실패한 정부 주도의 서독식 패러다임을 고집하지 말고 민간 교류 주도로 성공한 양안관계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해야 할 때다. 예컨대 민간 주도로 개성공단을 운영했다면 남북한 정부 당국이 중단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대북정책 패러다임 전환은 최고지도자의 정책적 결단이 우선돼야 하며 국민 공감대 구축과 법·제도화가 함께 추진돼야 한다. 또 북한의 체제 안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면서도 한미일 공조 확장억제전략을 견지해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오늘날 양안관계 패러다임 전환 성공도, 한중관계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남북한이 공존·공영하는 통일 이전 국가관계로 패러다임 전환 성공과 장래 민족통일을 가능케 하는 토대다. 주변 국가들도 남북한의 패러다임 전환을 환영할 것이다.

이규태 前 가톨릭관동대 교수(법학·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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