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쌓아 올린 ‘하루키 월드’ 시작이자 완성과도 같은 소설[북리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
‘나’와 ‘너’만 아는 도시 속
현실·환상 넘나드는 서사에
단절·상실·재생 탐구 압권
43년간 묻어둔 미완성 작품
팬데믹 겪으며 3년간 다듬어
글의 마지막 ‘주인공의 선택’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같아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17세 소년인 ‘나’와 16세 소녀인 ‘너’.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소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의 무의식 저 깊숙한 곳에 와서 박힌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이후 ‘너’는 돌연히 사라지고 텅 빈 마음을 안고 살다 45세가 된 ‘나’는 어느 날 ‘구덩이’로 떨어진다. 눈을 떠보니 구덩이는 소녀가 이야기한 그 ‘도시’. 그곳의 규칙대로 ‘나’는 ‘그림자’를 떼어내 버린 채 도시에 들어가고 마침내 ‘너’를 만나지만,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도입부다. 지난달 28일 예약 판매가 시작된 뒤 국내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벌써 3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다.
주인공이 상실을 겪고 고독한 여행을 하며, 초현실적 사건과 불가사의한 존재와 만나는 플롯은 하루키 작품의 주된 특징이다. 신작 역시 이를 충실히 따른다. 하루키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서관, 비틀스, 클래식, 재즈, 성에 대한 세심한 묘사도 긴밀히 어우러진다.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도 한평생 천착해온 질문인 ‘상실과 재생’을 주요하게 탐구한다. 그는 ‘작가 후기’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빌려 신작이 본인이 줄곧 써온 이야기의 연장임을 고백한다.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작품은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인 동시에 43년 만에 비로소 완성한 것이다.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한 동명의 중편을 장편으로 확장해 썼다. 당시 하루키는 이 소설을 미숙한 작품으로 여겨 단행본으로 내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은 작품은 이것이 유일했다. 작가의 네 번째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에서 한 개의 뿔이 달린 짐승들이 사는,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소재가 활용되기도 했으나 작가에게 이 작품은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와 같았다. 이 작품을 다시 꺼내 든 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시작한 2020년이다. 이어 그는 3년간 작품을 고쳐 썼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하루키의 초기작 특징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평생 쌓아 올린 ‘하루키 월드’의 요소들이 집약돼 있다. ‘하루키 월드’의 시작이자 완성과도 같은 소설인 셈이다.
팬데믹 이후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관한 소설을 다시 꺼내 든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고립되고 단절됐던 그때의 모습이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이미지와 맞닿았으리라. 작가는 지난 4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고 있으며 글로벌리즘이 흔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벽 안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그 벽을 넘어서서 떠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한 강연에서도 그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 사이에 생긴 경계심을 소설 속 ‘벽’과 연결해 설명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철저히 고립돼 고요한 삶을 산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전기는 없으며 거의 모든 게 자급자족이다. 외부와 통하는 문은 하나뿐인데 이마저도 덩치 큰 문지기가 가로막고 있다. 여러모로 모순투성이인 공간이지만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비록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의 곁엔 ‘너’가 있고 매일 퇴근길을 함께할 수 있다. 현실에서 ‘너’ 없는 기간을 견뎌온 ‘나’에게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적어도 고독하진 않은” 장소다. 하지만 ‘나’는 계속 자문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계속 살 것인가, 밖으로 나가 현실 세계를 살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은 ‘선택’을 한다. 작가는 이로써 우리가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답을 준다. 하지만 결론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떤 세계에 속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에 앞서 작품은 우리가 하루키 소설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충분히 안겨준다. 하루키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유려한 문장,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서사로 책을 펼치면 좀처럼 덮을 수 없는 하루키 마법이 십분 발휘된다. 768쪽, 1만95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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