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안한 집’, 견고한 연출에 5시간이 물 흐르듯… ‘쇼트폼 시대’ 무색하게 하네
“1·2부가 드라마라면 3부는 시”
한달 전부터 파트 끊지않고 연습
대사·미술·사운드 탄탄하게 엮어
“긴시간 함께하니 커튼콜도 애틋”
관객들, 식사 대신 ‘스낵터미션’
배우들, 등장 않는 순간에도 몰입
“전쟁은 아주 참혹했지. 아가멤논 왕은 성질이 났고 사제는 목소릴 높였어. 신들의 응답을 들은 왕은 깨달았어.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소중한 그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는 걸. 바로 이때, 딸아이가 등장해.”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코러스의 대사를 시작으로 5시간짜리 연극 ‘이 불안한 집’의 막이 올라간다. 지난달 31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의 연극은 1부 110분, 2부 95분, 3부 65분으로 인터미션까지 포함하면 300분에 달한다. 영국 작가 지니 해리스가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한국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1부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딸 이피지니아를 죽인 왕 아가멤논(문성복)에게 복수하는 왕비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 이야기, 2부는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살해하기까지의 과정, 3부는 정신과 의사 오드리(김문희)에게 상담받는 엘렉트라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막대한 분량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완성도와 몰입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 연극을 ‘5시간짜리 공연’이라는 화제성으로만 주목하는 건 아쉽다. 짧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쇼트폼 시대’를 역행하는 이 연극이 남은 회차들에서 80%에 가까운 예매율을 기록하며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출, 배우, 관객의 입장에서 ‘이 불안한 집’을 살펴보자.
# 연출
‘이 불안한 집’의 연출을 맡은 김정은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전율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작품에 빠져들었다. 5시간에 달하는 연극을 어떻게 구성해 관객들도 ‘전율’을 느끼게 할지가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김 연출은 “긴 호흡의 작품인 만큼 개막 한 달 전부터 런스루(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연습하는 것)를 준비해 허점들을 찾았다. 1·2·3부에 존재하는 연결점들에 고리를 만들고 끊임없이 그 고리들을 잇는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요즘 그는 ‘이 불안한 집’을 매일 관람하고 있다. 김 연출은 “그동안 죽도록 해왔던 노력들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무대에 미술과 사운드로 채워지고 있다. 그 위에서 배우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는 광경을 뿌듯하게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작품의 관람포인트는 대사. “에너지와 드라마의 광풍 속에서 목이 쉰 배우들이 죽어라 외치는 소리가 관객의 가슴을 두드리죠. 그때 열린 마음속에 어떤 한 줄의 대사가 남을지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배우
배우들에게도 큰 도전인 작품이다. 엄청난 양의 대사는 물론이고 긴 호흡의 작품 속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출연하지 않는 순간에도 무대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엘렉트라와 이피지니아는 1∼3부 꾸준히 등장해 쉴 틈이 없다. 엘렉트라 역의 신윤지는 “3권의 두꺼운 대본을 받았을 때, 여러 번 나눠 공연한다고 생각했지, 한 번에 다 올라갈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며 “대사는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지는데 체력이 걱정이다. 운동도 하고 영양제도 챙겨 먹고 있다”고 했다. 이피지니아는 극 초반에 죽지만 혼령으로 계속 등장해 대사 없이 동작과 표정만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이피지니아를 맡은 홍지인은 “장면 연습에 들어가면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보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전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려고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노력했다”며 “공연 중 쉬는 타임이 있으면 분장실에서 모니터로 지켜보며 감정선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5시간 동안 관객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서일까? 커튼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신윤지는 “관객들과 5시간을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긴 시간을 함께해준 마음에 감사했다. 이번 작품에서 커튼콜이 유독 특별히 다가왔다”고 했다.
# 관객
5시간짜리 연극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재미있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공연이 평일 기준 오후 5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진행돼 저녁 식사를 하기 애매한 시간이다. 관객들은 인터미션에 명동예술극장 앞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간식을 먹고 복귀하며 ‘스낵터미션’을 활용하는 열정을 보였다. 관객들은 “5시간 보니까 하루 종일 보는 것 같다”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열띤 토론을 펼쳤다. 긴 시간에도 관객들이 이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건 1∼3부가 각각 다른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차별되기 때문. 1부는 아가멤논을 향한 클리템네스트라의 복수극이 주된 내용이지만 8명의 코러스가 극을 이끈다. 배우들의 고난도 무용 동작, 극에 달한 감정을 표출하는 연기가 어우러져 110분이라는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유머 코드도 중간중간 삽입돼 큰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파트이기도 하다. 엘렉트라의 복수극을 다룬 2부에선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부 ‘아이기스투스’(윤성원)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 연극 ‘벚꽃동산’ 등에 출연한 윤성원은 왕비를 향한 ‘삐뚤어진 사랑’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그가 묵직한 칼을 바닥에 끌고 다니며 내는 신경을 긁는 쇳소리,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감정은 관객이 ‘이 불안한 집’에 들어왔음을 실감케 하는 요소. 현대로 시간을 옮긴 3부는 1·2부와 이어지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을 준다. 관객들이 1·2부와 3부 사이 연결고리가 느슨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김 연출이 해석과 연출에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인 파트다. 김 연출은 “1·2부가 피와 살인으로 소용돌이치는 드라마라면 3부는 고요한 시로 표현했다. 3부는 달아날 방법도 모른 채 작아져 버린 현대 인간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24일까지.
유민우 기자 yoom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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