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누명 쓰고 북으로 간 광고디자이너 임군홍의 가족 사랑
월북화가 임군홍 ‘가족도’
“북으로 간 제 아버지의 작품들입니다. 한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
1983년 9월이었다. 서울 압구정동 예화랑 전시장에 임덕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30대 남자가 불쑥 찾아와 그림 꾸러미를 내밀었다. 화랑주이자 한국화랑협회장이었던 김태성은 황당했지만, 화가의 내력을 물었다.
“아버지 이름은 임군홍입니다. 저는 둘째 아들인데, 1950년 전쟁 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국군의 서울 수복 직전에 채근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시고 이후 생사를 모릅니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중국 한커우와 베이징, 조선 경성에서 광고 인테리어 디자인 활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셨다고 합니다. 100점 이상의 유화와 드로잉을 남겨놓고 가셨는데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30년 넘게 집안에 고이 보관해오셨습니다.”
김태성은 짚이는 게 있었다. 자신의 장인인 이완석(1915~1969)이 일제강점기 산업디자이너이자 컬렉터였으며, 서울 종로4가에서 천일백화점 화랑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완석이란 분 아십니까? 천일백화점에서 일하셨는데…” “예? 아, 완석이 아저씨!!” 임덕진은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완석과 임군홍은 절친한 사이였다. 임군홍의 월북 직후 남은 가족이 광장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힘들게 살 때도 이완석은 명절 때마다 찾아와 부인 홍우순과 아들 덕진에게 용돈을 쥐여주던 의리의 아저씨였다. 임덕진이 가져온 그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1930~40년대 여인과 풍경 등을 그린 유화와 드로잉들인데 자유로운 필선과 파격적인 색감이 돋보였다.
김태성은 당시 ‘계간미술’ 출신의 떠오르는 30대 미술사가로 한국일보에 ‘근대미술 100년’을 연재하던 평론가 윤범모를 소개시켜줬다. 낯선 이름의 월북작가 작품이 발굴됐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던 윤범모는 서울 장위동 임덕진의 집을 찾아갔다가 다락방에 돌돌 말린 채 잔뜩 들어찬 그림 더미를 보고 놀랐다. 화단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대가를 재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윤범모는 특집 기사를 써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렸고, 이듬해 2월에는 해금이 되지 않았는데도 서울 롯데백화점에 있는 롯데미술관에서 근대한국미술의 발굴이라는 표제로 유작전을 기획한다. 월북작가 해금이 1988년에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꽤나 놀라운 일이다. 1985년 임덕진은 ‘모델’과 ‘여인좌상’ 등 5점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특별전까지 열게 된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서슬 퍼런 5공 시절에 미해금 작가의 전시를 대뜸 아들 임덕진씨와 뜻을 맞춰 기획한 건 지금 생각해봐도 젊은 시절 무모한 객기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기념일인 지난 7월27일부터 서울 예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화가 임군홍_ Lim Gunhong, The painter’전은 이런 곡절어린 사건을 거쳐 이뤄진 것이다. 월북화가 임군홍(1912~1979)의 기구한 삶과 그가 가족들에게 남긴 ‘가족도’를 비롯한 컬렉션이 부인과 아들의 정성으로 분단시대에도 살아남아 전시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 출신의 임군홍은 주교공립보통학교 졸업 뒤 가세가 기울면서 치과기공사로 일했으나 이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베이징과 우한을 오가며 중국 풍광을 담은 여러 유화를 그린 그는 1930년대 이미 서울과 우한에 디자인 기획사를 운영했고, 해방 뒤엔 서울에서 광고미술기획사를 세워 디자이너로서도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상업 디자이너로서 큰돈을 벌던 그는 1948년 운수기관 홍보 달력에 월북 무용가 최승희 그림을 실었다는 이유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 윌리엄 딘 미군정장관의 사면으로 풀려났지만 곧 이어진 한국 전쟁 당시엔 서울에 남았다가 명륜동 집 인근의 동성고 교정에 차린 북한의 미술품 제작소에 동원돼 김일성 초상을 그리는 등 부역해야 했다. 그러다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앞두고 자기 가족의 대작 그림을 이젤에 미완성으로 세워놓은 채 생이별을 하게 됐다.
북한에선 개성에서 미술가동맹 요직을 맡았으나 1960년대 함북 청진으로 하방돼 자신의 전공도 아닌 전통 조선화를 그리다 1979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부인 홍우순은 남편의 월북 뒤 정부의 핍박과 생활고 속에서도 가족도를 비롯해 작가가 남긴 그림들을 다락방 속에 숨겨놓고 지극정성으로 관리했다. 부인은 1982년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임덕진에게 아버지 그림을 꼭 세상에 내보이라고 유언했다. 아들은 그해 예화랑 김태성 대표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결국 40여년 뒤 김태성 대표의 딸 김방은 대표의 의지로 유족소장 임군홍 작품 대부분인 130여점을 전시하게 됐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임덕진이 자기 몸처럼 아끼며 매일 같이 대화해왔다는 가족도와 그의 백일 때를 담은 그림과 고양이 그림이다. 가족도는 미완성으로 남았고 이후에도 모친이 집 안에 이젤에 걸어두었던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딸을 임신한 부인이 둘째 아들 덕진씨를 안고 있고 그 옆에 있는 큰딸이 함께 앉아 집에서 수집한 각종 골동품과 기물들, 뜨락의 백합꽃을 응시하는 이 작품은 선연한 선묘와는 별개로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면서도 아릿한 분위기가 와닿는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154-2번지 임군홍의 옛집 자리에는 지금도 감나무가 남아있다. 1950년 9월 임군홍이 북행길을 나서며 가족과 생이별하는 장면을 지켜봤던 산 증인이다. 옛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인근 대학로 젊은이들이 모이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임씨는 앞으로도 가족도를 아버지의 분신처럼 보관할 것이라며 이제 이 작품과 아버지를 한국 미술사의 상석에 모시는 일이 남았다고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예화랑·임덕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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