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새로 나온 책]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유현아 지음, 창비 펴냄
“사람의 말을 이어가는 시.”
도시의 골목은 모두 아파트가 되었거나 될 것이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주던 노포 앞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전 안내’ 현수막이 내걸린다. 자꾸만 사라지는 골목을 걷던 시간이 시가 되었다. 남아 있는 골목마다 “구부러진 잠을 자는 사람들”(‘질문들-옹호’ 일부)과 “생활이 계절을 앞서가지 못”한(‘토요일에도 일해요’ 일부) 사람들이 아직, 있었다. 그들이 사느라 느낀 통증을 받아 적으니 그 또한 시가 되었다. 내가 딛고 선 발밑이 자꾸만 꺼지는 것 같을 때, 시인은 섣부른 위로 대신 “바닥 밑의 바닥”(‘오늘의 달력’ 일부)까지 함께 내려간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이 시집을 선물하고 싶다.
전염병 일지
대니얼 디포 지음, 서정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신의 자비를 누렸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감염자와 감염 주택에 대한 명령’ ‘거리 청결 유지를 위한 명령’ 등. 1665년 페스트가 휩쓸었을 때 영국 정부가 내린 행정명령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각국이 정한 지침과 유사하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가난한 이들이 훨씬 빠르게 죽어나갔다는 점.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소설가 대니얼 디포는 자신이 세 살 때 벌어진 이 비극을 추적해 꼼꼼히 기록한다. “이 모든 기록을 바탕으로 나는 병이 끝난 후 과거의 재난을 기억하며 우리가 더 자비롭고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3년, 세상은 과연 그의 바람대로 바뀌었을까?
느리게 산다는 것
피에르 쌍소 지음, 강주헌 옮김, 드림셀러 펴냄
“나에게 권태는 세상을 다시 음미하는 수단이다.”
제대로 쉬거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세상의 흐름은 더욱 빨라지고, ‘느린 사람’에 대한 평판은 여전히 좋지 않다. 지칠 줄 모른다는 것이 경쟁력이 된 시대, 프랑스 철학자인 저자는 행복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느림’과 ‘권태’를 제안한다. 성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서. 한가로이 걷는다는 것은 시간에 떠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곧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라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어떤 편견 없이 권태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인간의 불행은 차분히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폴커 키츠 지음, 배명자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
“자신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그리고 처벌받지 않고 사는 방법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법을 잘 알고 잘 활용하는 능력으로 얼마나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요즘처럼 실감하기 쉬운 시대가 있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독일에서 일어난 19건의 실제 사건을 통해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법을 의심하고 바꿔나갔는지 흥미롭게 추적한다. ‘인간 같지 않은 범죄자에게 존엄성이 있는가’부터 여성 할당제, 표현과 종교의 자유, 교육권, 안락사 등 한국에서도 첨예하게 논란 중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독자들이 법 개정 사례들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익힐 수 있도록 구성됐다. 법에 대한 지식은, 법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호신술’이기도 하다. 이 책을 입문서로 법 지식을 쌓아나가면 어떨까?
대지에 입맞춤을
조시 티켈 지음, 유기쁨 옮김, 눌민 펴냄
“우리가 어떤 음식을 선택하는지가 우리의 문명을 만들거나 붕괴시킬 것이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기후변화를 역전시키고 당신의 몸을 치유할 수 있을까. 질문과 함께 책은 시작한다. 영화감독인 저자는 농업이야말로 대기 중의 탄소를 땅속으로 보내 가두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본다. 해마다 밭을 갈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는 관행 농업이 사막화와 기후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토양 속 미생물을 살리는 재생 농업을 제안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토양과 농업, 음식 산업을 폭넓게 조망한다. 대규모 농장부터 레스토랑, 기후 회의까지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현장 연구를 토대로 한다.
아기 퍼가기 시대
캐런 윌슨-부터바우 지음, 권희정 옮김, 안토니아스 펴냄
“이 책은 일종의 폭로이다.”
미국에 ‘아기 퍼가기 시대’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3년까지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 미혼모의 영아 입양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낙태 합법화 전이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피임 도구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전쟁이 끝난 뒤 심리적 결함이 있는 미혼 여성이 사생아를 임신한다는 관점이 등장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라는 편견이 자리 잡았다. 이들을 돕는 좋은 방법은 출산 직후 아기를 입양 보내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렇게 미혼모는 입양 시스템의 표적이 됐다. 아기 퍼가기 시대, 스스로 양육 의사가 있는데도 딸을 입양 보냈다가 30년 만에 재회한 저자가 그 시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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