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들이 뭉친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장난 아니었던 푸틴·김정은 밀착 [박수찬의 軍]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두 국가가 빠르게 밀착하고 있다. 바로 북한과 러시아(옛 소련)다.
미국 뉴욕타임즈(NYT)는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달 중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러시아에 공급하는 방안과 양국 군사 협력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다급한 처지의 두 지도자가 만나서 군사적 거래를 하면, 큰 파장이 불가피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남북한 대리전, 한반도에선 북한과 러시아 대 한·미·일의 대립 구도가 뚜렷해지는 셈이다.
◆전쟁 장기화로 北 주목하는 러시아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병력과 물자를 대거 투입하는 소모전이 진행중이다.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을 저지하고자 투입한 지뢰와 포병전력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양의 물자가 필요하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다.
러시아군에게 가장 급한 것은 탄약이다. 러시아군은 매일 포탄 수만발을 쏘는 전통적인 재래식 전투방식을 쓴다.
국내 공급망이 포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면, 작전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노후 중화기는 러시아에서도 탄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러시아가 가능한 모든 곳에서 포탄 조달을 시도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러시아가 원하는 122·152㎜ 포탄과 로켓탄은 우크라이나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물자라는 점이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양측이 해외에서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는 서방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탄약 확보에서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개월 전 온라인에 공개됐던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집트는 122㎜ 로켓탄 4만발을 러시아에 몰래 보내려 했다.
하지만 미국이 개입하자 이집트는 탄약을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것으로 선회했다.
FT는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인 국가가 북한 탄약을 러시아군이 입수하기 전에 압수, 우크라이나군에 전했다고 보도했다.
탄약의 국내 생산량은 부족하고, 서방 제재로 수입도 쉽지 않은 러시아에게 북한은 중요한 국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T-55, T-62 전차와 BM-21 다연장로켓, D-30 122㎜ 곡사포 등 소련 시절 구식 중화기를 투입하고 있다.
이들 무기를 쓰려면 포탄이 필수다. T-55, T-62 전차는 각각 100㎜, 115㎜ 포탄을 사용하는데, 현재 러시아군 주력전차인 T-72 등은 125㎜ 포탄을 쓴다. 다른 포병장비는 하루 수만발씩 포탄을 쏘는 소모전을 치르고 있다.
북한은 T-55, T-62 계열 전차를 최근까지 사용했고, 122/152㎜ 포탄은 현재도 쓰고 있다. 러시아가 퇴역시킨 노후 장비를 아프리카 등에서 정비하는 서비스를 제공한 적도 있다.
북한군은 한반도 전면전에 대비한 대규모 포병 및 기갑전력을 갖고 있어 다양한 종류의 탄약을 대량 비축했을 가능성이 크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 당시에 드러난 것처럼 북한산 포탄이 품질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군이 원하는 탄약은 고도의 정교함이 필요치 않은 구형이다. 러시아군 중화기에 쓸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일각에선 KN-23 단거리탄도미사일이나 초대형방사포 등이 러시아에 판매될 가능성도 나온다. 하지만 서방도 에이태큼스(ATACMS)나 타우러스(TAURUS) 등의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등의 후속조치로 맞설 가능성이 있어서 러시아도 신중하게 나설 것으로 보인다.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가 북한에서 대량의 무기를 들여오면, 철도로 북한과 러시아 국경을 통과해 연해주로 운송한 뒤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러시아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우크라이나로 병력과 장비를 운반하고 있어 북한산 탄약 운반도 쉽게 이뤄질 수 있다.
북한이 오랜 기간 무기밀매를 진행하면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선박 편으로 우회 수출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압박 등을 의식해 러시아를 물밑에서 지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기가 사전에 문서로 지정된 국가 대신 다른 나라로 넘어가면 최초 수출국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제3세계 국가에선 이같은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서류상 구매자와 실제 최종사용자가 다를 수 있다.
북한이 실제로 러시아에 대규모 무기 판매를 단행하면, 한국이 지원한 지뢰탐지기나 방호복을 갖춘 우크라이나군이 최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설치한 북한산 지뢰나 폭발물을 발견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게 된다. 사실상의 남북 대리전에 되어버리는 셈이다.
◆北, 경제·군사·외교 이익 얻을 수 있어
북한은 수십년에 걸쳐 불법 수익 창출 또는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세계의 분쟁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루한스크,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바그너 그룹에 무기를 판매해 이익을 얻었다.
무기를 주고 현금이나 식량, 원유로 대금을 받으면 경제적 이익이 생긴다.
미 농무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북한의 쌀 생산량은 작년과 비슷한 210만t으로 예상된다. 북한이 식량 증산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비료 공급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밀과 옥수수를 제공하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를 이용해 유엔 등 국제사회 제재를 무력화하는 효과도 있다.
무기수출은 북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었지만, 2006년 10월 유엔 안보리가 무기 수출을 금지한 이후 불법적 거래에 의존해야 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대규모 거래도 쉽지 않다.
그런데 러시아가 북한에서 무기를 사들이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국제사회 제재를 따르지 않는 모양새가 된다. 1차 핵실험 이래 유엔이 만든 대북 제재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차원의 조치가 중국, 러시아의 반발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무기 구매는 북한에 또다른 외교적 승리나 다름이 없다.
북한이 무기 거래를 통해 군사교류의 물꼬를 트고 나서 러시아에서 첨단 기술이나 무기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최근 북한이 두 차례 발사에 실패했던 우주발사체와 관련, 러시아 측에서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우주발사체 개발 및 발사 경험이 풍부한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한·미 연합군과의 격차가 가장 큰 해·공군 보강을 러시아에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2000년대부터 신형 전투기 도입을 수차례 시도했다. 신형 기종을 들여와야 구식 전투기를 퇴역시킬 수 있지만, 대금 지급과 정치적 문제 등으로 노후 기종을 계속 쓰고 있다.
그 결과 북한 공군은 미그-29과 수호이-25를 제외하면 실전 투입이 제한되는 상황에 처했다. 지난해 북한이 공군기를 대거 띄워 무력시위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이유다.
러시아와의 무기 거래를 계기로 신형 전투기 도입이나 기존 기종의 성능개량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해군 전투함도 러시아가 전자장비와 무장 등을 지원하면 화력을 단기간 내 강화할 수 있다.
양국간 밀착이 일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가 무기 생산 능력은 충분히 갖춘 만큼 북한과의 거래는 긴급 소요에 대응하는 임시 조치라는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 오래 지속되려면 이해관계와 별도로 양국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요소가 더해져야 한다. 하지만 반미와 무기 거래 이외에는 상호 결속을 단단히 해줄 부분이 뚜렷하지 않다.
비정상적 상황에서 서로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외교는 일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는 있으나, 그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미지수다. 북한과 러시아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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