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화된 노예’로 배불린 근대 유럽…그 뒤얽힌 역사 [책&생각]
은폐된 아프리카의 존재·의미 짚어
유럽 관심은 아시아 아닌 아프리카
황금, 노예노동, 설탕과 면화까지
본 인 블랙니스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l 책과함께 l 3만3000원
‘지중해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을 피해 아시아로 우회 진출하려던 유럽의 열망이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이것이 근대 세계의 출발점이 됐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세계사 서술이다. 이와 함께 강조되는 것은 유럽이 다른 세계와 달리 고유하게 지녔던 창의력과 독창성, 이를테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킨 산업혁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트리니다드 출신으로 훗날 그곳의 총리가 되는 에릭 윌리엄스(1911~1981)는 1938년 옥스퍼드대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가 없었다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동력으로 지탱된 카리브해의 노예 플랜테이션 농업이 없었다면, 19세기 서구가 향유했던 부의 폭발적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일찍 혹은 급속하게 산업화가 이뤄지지도 못했을 것이다.”(‘자본주의와 노예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언론인이자 학자인 하워드 워링 프렌치(56·미국 컬럼비아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는 ‘본 인 블랙니스’에서 근대 세계의 형성에 핵심적인 구실을 했으나 기존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은폐되어온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 대한 장구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아프리카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근대성이라는 기제의 중심축으로 작동해왔다. 플랜테이션 농업의 발전과 담배, 커피, 카카오, 인디고, 쌀, 그리고 무엇보다 설탕과 같이 역사를 바꾼 환금작물들을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가 맺어온 깊은, 그리고 대개는 잔혹했던 관계가 말 그대로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 경제를 낳았다.” ‘잔혹했던 관계’란 에릭 윌리엄스가 말한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동력’, 곧 노예노동을 말한다.
지은이는 15세기 유럽의 적극적인 해양활동은 애초 아시아를 향해서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향해서 시작됐고, 그 중요성은 이후에도 커지면 커졌지 줄어든 바 없다고 지적한다. 14세기 세계지도 ‘카탈란 아틀라스’는 “그의 땅에서 채굴한 풍성한 황금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고귀한 왕”이라며 아프리카 서쪽 말리제국과 이를 통치하는 만사 무사를 표시했다. 이베리아반도 국가들은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서부)를 장악한 무슬림을 피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잠재적 우호 세력과 그들이 지녔을 막대한 황금을 찾고 싶어했다. 선두에 섰던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진해 1471년 지금의 가나 지역에 있는 ‘엘미나’(광산이란 뜻)를 ‘발견’했고,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며 황금무역의 핵심 경로를 선취한다. 이 ‘황금해안’은 포르투갈로 매년 약 680킬로그램의 황금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전 세계 금 공급의 약 10분의 1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횡재에 놀란 다른 유럽 나라들 역시 너도나도 황금해안을 향해 질주해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렇게 본격화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뒤얽힘의 핵심은 황금에서 노예로, 그리고 그 노예들이 플랜테이션에서 생산하는 환금작물인 설탕에서 면화로 옮겨갔다. ‘황금해안’에서 포르투갈은 금속 가공물·직물로, 아프리카 아칸왕국은 금으로 교역을 했으나, 점차 ‘흑인의 몸’, 곧 노예를 사고파는 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정치체제가 없었으며,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던 사회들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경쟁국가와의 전쟁) 포로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가책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유럽인은 대서양 연안의 섬들에서 단일 작물을 생산하는 플랜테이션을 시험해오고 있었는데, 상투메섬의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이것이 온전히 산업화된다. “상투메섬은 흑인을 처음부터 동산(chattel)으로 전환시켜버렸던 첫 번째 장소”로, 기존의 노예제와 다르게 영원히 가축의 지위를 부여한 흑인만을 노동력으로 삼는, ‘완전히 인종화된 노예제’가 여기서 시작됐다.
브라질은 이를 대규모로 확산하는 규모의 혁신을 이룬다. 질병에 따른 인구소멸과 저항 등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선주민을 노동력으로 길들이기 쉽지 않자, 아프리카에서 강제이주시킨 노동력을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적용하는 길을 연 것이다. 16세기에 약 37만명의 아프리카인이 사슬에 묶여 대서양을 건넜고, 카리브해 연안에서 설탕생산이 시작된 17세기에는 그 규모가 5배로 늘었다. 18세기에는 앞 세기보다 3배 늘어 약 610만명이 신세계로 끌려갔다. 그 사이 대서양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옮겨갔고, 영국은 바베이도스섬과 서인도제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까지 혹사시킨 뒤 새 노예를 구매하는 게 가장 비용이 적게 든다”고 말하는, “편협하고 완고하게 이윤과 전문화를 추구”하는 근대성을 창출해냈다. 다른 세계를 압도한 근대 유럽의 부는, 그리고 거기서 싹튼 시민 사회와 근대적 공론장 등은 랭커셔 지역에서 시작했다는 산업화나 기계, 국제해운업, 자유주의적 은행법 따위가 아니라 인간을 가축으로 만들어 부렸던 노예노동에서 나온 것이다.
설탕 다음은 면화였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를 중심으로 발전한 면화 플랜테이션으로 세계 제일의 부국이 됐는데, 이를 떠받친 것 역시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예노동이었다. 미국은 1865년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소작제나 짐 크로 법 등 “흑인을 계속 노역에 묶어두기 위한 사회적·법적으로 기발한 방식들을 수도 없이 도입했”고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책이 강조하는 것은 근대성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뒤얽힘’으로 창출됐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은 비참한 조건 아래 짜내야 했던 땀과 생산성으로, 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노예봉기이자 자유국의 탄생으로 이어진 유일한 노예해방 운동”인 아이티 혁명에서 보듯 오랫동안 그 아래에 면면히 흘렀던 저항으로, 이 근대성의 핵심 주체였다. 불평등, 대규모 이민의 파도, 환경 악화 등 우리 앞에 놓인 전 지구적 ‘근대의 문제’의 해결 역시 오직 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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