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속살까지 사랑하는 법, 그것이 번역이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9. 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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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 │ 정은귀
한국 시를 영어로, 영문 시를 우리말로
이성복·강은교, 글릭·섹스턴 등과 대화
“시는 삶의 진창에서 피어난 언어,
그 신비한 힘 모르는 게 슬퍼”
정은귀 교수는 “시는 모호함이 큰 무기인 언어라서 머물러 응시할 때 의미가 살아나기에 시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이 번역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외대 제공

초등학교 때 꿈은 초등학교 교사와 시인이었다. 중학교 때 꿈은 중학교 교사와 시인이었다. 고등학교 때 꿈은 고등학교 교사와 시인이었다.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의 여백을 상상하며 시를 읽고 쓰던 소녀는 결국 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에게 번역의 출발은 시에 대한 사랑이었다. 처음 시를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냥 좋아서 학창시절 내내 혼자서 했다. 남들 앞에 번역물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였다. 유명한 시인인 지도교수가 그에게 한국 시를 소개해 줄 것을 권했다. 신이 나서 열정을 불태운 결과, 시 전문 번역가로서 이력이 빼곡히 쌓여갔다. 이성복, 강은교, 심보선 등의 시집을 미국 출판사에서 출간했고, 루이즈 글릭, 앤 섹스턴,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등 20여권의 영미 시집을 국내에 소개해왔다.

그에게 “시란 어떤 움직임이자 에너지다. 익숙한 것과의 작별이자 새로운 발견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을 일깨우고, 우리가 쫓아온 허상을 드러낸다. 그런 시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이 번역을 하는 것”이다. “시는 모호함이 큰 무기인 언어라서 머물러 응시할 때 의미가 살아납니다. 시 구절들은 여러 층위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결단하고 선택하는가가 번역이죠. 번역을 하게 되면 시의 가장 속살까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번역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시 번역은 소설이나 에세이 등 산문 번역과 달리 운율과 리듬, 행 배열 등 형식적인 고민도 치열하게 해야 한다. 그는 “번역가는 최초의 독자이자 최후의 비평가로서 그 시를 가장 친밀하게 알고 그걸 완전히 다른 언어로 갈아입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며 “가장 좋은 시 번역은 그 시의 시다움을 가장 잘 살려낸 번역”이라고 전했다. 영시의 운율을 똑같이 따라 하려고 각 행의 끝에 라임을 맞추어 번역을 하면 우리말로는 영 이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리듬을 정확하게 같은 위치에서 살리는 것은 불가능할 때가 많아, 번역에서는 한쪽에서 살리지 못한 운율을 다른 쪽에서 살려내야 한다.

그에겐 한국 시를 영어로 옮기는 것이나, 영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이 어렵고 늘 어렵다. 그래도 둘 다 똑같이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3시간 이상 번역을 하고 출근하는 이유다. 올가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의 시집 6권이 나와 총 13권이 완역될 예정이고 황인찬, 찰스 번스틴 등 그 뒤 번역 일정도 줄줄이다.

그에게 시 번역의 기쁨과 슬픔을 물었다.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시인과 대화를 하는 게 기쁨이라면 아무래도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게 슬픔”이라고. 특히 “시는 똑같은 하루하루를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 신비한 힘을 주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슬프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시인의 꿈을 가진 것은 “힘들 때마다 시를 읽으며 돌파할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가 아름답고 예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시는 삶의 진창에서 피어난 언어죠.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의 언어이기도 하고요. 이 세계의 처절한 패배와 폐허를 보는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힘들 때 시를 읽으면 굳건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잔가지들을 떨쳐내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가 시민대학에서 시를 오래 가르친 이유이기도 하다. 시는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의미를 되묻게 하기에, 시를 읽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좋은 사회라 그는 믿는다. 시를 가지고 시민교육을 하면 훼손된 언어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고도 믿는다. “시는 ‘언어의 소금’이기에.”

최근에는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담은 에세이집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을 나란히 펴내기도 했다. 그의 글은 시가 어떻게 삶을 통찰하게 하는 묵상이면서 위로하는 기도가 되는지를 다정히 알려준다.

어쩌면 이 모든 여정은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시집을 선물로 주면서 책 귀퉁이에 적어준 글귀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은귀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래요.” 그의 모든 말들은 시로 출발해 삶과 사랑을 향하고 있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The Colors of Dawn: Twentieth-Century Korean Poetry
이상, 박두진부터 천상병, 송경동, 진은영까지 총 44명의 근현대 한국 시인들을 골라 번역한 시집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과 독재정권 등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피어난 한국 시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정 교수는 “해외 한국학 수업에서 많이 쓰는 책이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 등, 하와이대학 출판부(2016)

Bari’s Love Song
강은교 시인의 ‘바리연가집’을 영어로 옮긴 시집이다.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처를 헤매는 ‘바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적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한다. 정 교수는 “원형적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강은교, PARLOR PRESS(2019)

야생 붓꽃
풀리처상부터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상, 노벨문학상까지 지난 50년간 미국 시 문단의 중심에 서 있는 루이즈 글릭이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시집이다. 정 교수는 “꽃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 그리고 신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시집으로 서정시의 실험성과 올곧은 목소리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루이즈 글릭, 시공사(2022)

밤엔 더 용감하지
평생 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여성의 이야기를 대범하게 그린 20세기 미국 대표 시인 앤 섹스턴의 시집이다. 정 교수는 “시에서 다뤄지기 어려운 주제들을 날것으로 내지르는 목소리로 10년 전에 나왔으면 한국에서 관심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뒤늦게 번역됐지만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번역된 작품”이라고 전했다.

앤 섹스턴, 민음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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