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핫플] 수장고가 열리고…이름 없는 유물들 속에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지유리 2023. 9. 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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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핫플] (24) 경기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민속유물 10만여점 빼곡히
보존·연구작업 보는 재미도
옛것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영감 얻어간다면 ‘금상첨화’
시민들 기증한 책·영상 등
현시대 생활상도 차곡차곡

“이게 수장고라고요?”

높이 13m의 거대한 유리 벽장이 은은한 주황빛을 발한다. 격자 모양으로 정렬된 선반에는 백자항아리·옹기·맷돌·향로 등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다. 압도적 크기와 수를 자랑하는 전시품은 황홀경을 만들어낸다. 작품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근사한 이곳은 유물을 보관하는 전용 공간, 수장고다.

경기 파주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로비에 있는 높이 13m의 수장고 타워. 칸칸이 자리한 유물이 빛을 받아 신비로워 보인다. 파주=현진 기자

◆13m 유리 벽장=수장고(收藏庫)란 ‘귀한 것을 고이 간직하는 창고’다. 흔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보관하는 장소를 말한다. 그동안 수장고는 관람객 발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람은 물론 햇빛·바람·습도 모두가 작품을 손상하는 요인이 되기에 외부와 철저히 차단했던 것.

민속유물 10만여점을 보유한 경기 파주의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이하 파주관)’는 ‘열린 수장고’다. 그간 꼭꼭 숨겨두었던 수장고를 활짝 개방했다. 누구나 들어가 가까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물 보호와 감상,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곳이 바로 파주관 로비에 위치한 수장고 타워다. 사방의 벽과 선반을 유리로 제작해 어디에서나 유물을 볼 수 있게 한 이곳에는 빛이나 습기에도 훼손되지 않는 도기·토기·석기만 보관한다.

고려∼조선시대 소반들. 수장고 안 민속품은 종류별로 구분해 진열된다. 생산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수장고 타워로 들어갔다. 신비로움을 뽐내던 바깥과 달리, 내부는 도서관처럼 수납장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고 층층이 유물이 들어찼다. 수장고를 관람하는 방법은 일반 박물관과 다르다. 이곳 유물에는 이름이 없다. 생산 연대, 쓰임새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없다. 대신 낱낱의 유물마다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1-2-34’는 1수장고 둘째 칸에 있는 34번 유물이라는 뜻이다. 수장고에 있는 키오스크(무인안내기)에 해당 번호를 입력하면 그제야 관련 정보가 주르륵 뜬다. 화려한 수식어구 하나 없이 숫자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이곳이 전시관이 아니라 창고인 것이 실감 났다.

“으, 추워.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 같은데.”

어두컴컴한 16수장고에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더위도 물러갔건만 관람객 배려가 없다며 타박하려는 찰나 안내를 맡은 황경선 학예사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소반이나 떡살·반닫이처럼 나무로 만든 유물이 보관된 곳이라 온도 20℃, 습도 55%에 맞춰져 있습니다. 조금 추워도 유물을 위해 참아주세요.”

이곳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유물이니, 수장고마다 보관된 물건에 맞춰 항온·항습을 유지한다. 불평보단 새로운 경험이라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달래면서 옷깃을 여몄다.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낡고 오래된 것들을 눈으로 훑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췄다. 번쩍이는 금색 소반이 홀로 생경하게 빛났다. 아무리 미술품에 문외한이라도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챌 만큼 생김새가 개성 있다. 이는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하지윤 작가의 작품이다. 전통 소반을 본떠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일부러 옛 유물 사이에 현대의 작품을 배열했다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다른 미술관에선 감상하잖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정보를 얻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하 작가가 옛 소반을 모티프 삼아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던 것처럼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유물을 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활용하기를 바라요. 그것이야말로 열린 수장고의 의미입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유물=국립민속박물관엔 연간 4000점의 유물이 들어온다. 깨끗이 소독하고 낡거나 부서진 것을 복원해 보존하는 것은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다. 파주관에서 10명의 전문가가 유물 보존 처리와 연구를 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연구실도 ‘열려 있다’는 것. ‘보이는 수장고’라는 이름을 단 연구실 한편이 유리벽으로 돼 있어 훤히 들여다보인다. 유물 보존 처리 작업은 매일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사전에 공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운에 맡겨야 하는 것.

‘민속 아카이브’에는 주로 근현대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과 자료도 수집해두면 먼훗날 귀한 유물이 된다.

하지만 ‘열린 보존과학실’에 가면 유물의 보존 처리와 연구 과정을 그대로 재현해놓아 언제든지 그 과정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전시 공간이기도 하다.

“파주관에 있는 10만여점의 유물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을 보여드릴게요. 짜잔, 이겁니다.”

보존과학실에 들어선 황 학예사는 웃음기를 머금고 서랍 하나를 확 열어젖혔다. 나온 것은 온갖 바퀴벌레 표본. 실제 파주관에서 채집한 것들이다. 유물이란 워낙 오래된 것이라 자연히 다양한 해충을 지니고 있다보니 유물 천지인 이곳도 자연스레 해충 천지가 된다. 박멸해야 할 것들조차 전시품이 된다니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건 2000년대 영상 아닌가요?”

백자니 청자니, 한참 옛 물건들을 감상하다 2층 영상자료실로 이동했다. 한쪽 벽면에 눈에 익은 컬러 화면이 재생된다. 엊그제 본 듯한 서울 풍경과 몇해 전 발매된 음반도 수두룩하다. 민속박물관이라 해서 옛 물건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980년대 오일장을 찍은 사진, 1990년대 촬영한 홈비디오, 2000년대 발간한 책도 당당히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들은 대접받아 마땅한 유물이다.

영상자료는 대부분 일반 시민이 기증한 것들이다. 그래서 감상하다보면 익숙해서 더욱 관심을 일으켜 정이 간다. 친구의 사진집을 훔쳐본 듯 흐뭇해진다. 영상을 비롯해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기증할 수 있다. 생활상을 담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누리집에 기증 신청을 하면 관계자가 직접 방문, 소장품을 수거해 전문가 심의를 거쳐 등록한다.

민속박물관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현재를 수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곧 과거가 되고, 수십, 수백년 후엔 사라질 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반가운 물건들을 감상하며 “이런 것들도 박물관에 소장된다니 놀랍다”는 기자의 말에 황 학예사가 말했다.

“전시 안내를 하다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뭔지 아세요? ‘여기서 가장 비싸고 유명한 유물이 무엇이냐’는 거예요. 대답은 ‘없다’입니다. 모든 유물이 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거든요. 물건이 만들어지고 쓰이던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 유물의 가치이자 역할입니다.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유물을 감상하고 특별한 영감을 받아 가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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