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인구충격
'밖에서 벌어 안을 살 찌운다' 광고카피로도 쓰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다. 좁은 내수시장에 몰두하기 보다 해외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표현 역시 그 취지가 다르지 않다. 그렇게 '안'은 부유해졌지만 한국 기업들은 과거보다 더 '밖'을 봐야 한다. 인구 때문이다.
올 상반기 합계출산율은 0.76명이다. 지난해 0.78명에 못 미친다. 출생아수는 2015년 12월 이래 91개월 연속 감소 일로다. 연간 기준으로 지난해 24만9000명이었는데 올해 그보다 못할 것이다. 출생아 수는 2000년 60만명대, 2001년 50만명대에서 2002년 40만명대로 내려 앉았고, 이 추세는 줄곧 지속돼 왔다. 그 결과 총인구(지난해 5169만2000명)도 2021년부터 줄기 시작했다.
저출산으로 산부인과·소아과 병원, 유치원과 초·중·고가 문을 닫았다. 몇몇 대학은 존폐기로에 섰고, 군대는 병력자원 부족에 직면했다. 기업도 영향권에 들었다. 2014년 실적부진을 못 견딘 유아용품 업체 아가방의 주인이 바뀐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분유는 적자구조고, 학습지·참고서 시장도 쪼그라들었다. 기업들은 살 길을 찾아 움직였다. 매일유업, 일동후디스 등은 단백질 제품에서 활로를 모색했다. 교원은 상조회사를 차렸고, 진학사는 취업포털을 만들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2년생이 대학 3학년이 됐다. 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주류업체는 줄어든 술 소비를 실감한다. 장년·노년층은 술을 덜 먹거나 끊는다. 프리미엄 제품을 출시하거나 위스키 등 고가주류 판매 확대를 도모해 '양'을 '가격'으로 보전하고자 하지만 지속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2002년 이후 출생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생애 첫차를 구매하는 연령대가 된다. 1991~2000년 출생아수보다 2002년~2011년 출생아수는 177만명 가량 적다. 그만큼 자동차 수요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면허 반납 등으로 운전을 하지 않는 고령층도 계산해야 한다. 차량운행이 줄면 그렇지 않아도 전기차의 보급으로 폐업 위기로 내몰린 주유소가 타격을 받게 된다. 이미 일본이 경험한 일이다.
2002년 이후 출생아들이 결혼연령이 되면 혼수용 가전시장도 위축된다. 은행이 대출시장의 신규고객 유입이 예전만 못 한다는 것을 느낄 시점도 머지 않았다. 보험사는 들어오는 보험료보다 나가는 보험금이 많아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언급한 것처럼 기업들은 사업을 다각화하거나 제품가격을 올리거나 하면서 살 길을 강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형적인 내수산업 영역으로 여겨져 온 라면, 김치 등 식품업체가 수출과 현지공장 설립을 통해 대응하는 것이 한 예다. 문제는 나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업종의 기업이다. 안에서 뺏고 뺏기기를 하면서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인구문제에 대한 기업의 민감도는 어떤 업종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차·기아 등 해외매출이 더 많은 곳은 아직 체감도가 낮을 수 있다. SK하이닉스를 인수하기 전 정유와 이동통신이 축이었던 SK는 조금 더 절박한 편이다. 정유는 수출확대로 대처할 수 있지만 휴대폰 가입자수는 출산율을 높이거나 이민자를 받거나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유통 비중이 큰 롯데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SK가 난임 휴직, 임신기 단축근무, 초등학교 입학자녀 돌봄 휴직 등 여러 지원제도를 마련하고 롯데가 육아휴직을 의무화한 건 이같은 기업의 존재조건에 따른 고민의 산물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제 다른 기업도 저출산·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내수 시장 축소에 대비해야 한다. 지방자치체의 인구유치 경쟁처럼 시장점유율 다툼을 한다고 해도 '인구감소'라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런 만큼 정부의 인구정책과 별개로 기업이 출산친화적 환경을 만들어 '안'을 지켜내야 한다. 이는 기업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강기택 산업1부장 acek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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