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천재를 만나면 일단 앞세워라, 그리고

이영빈 기자 2023. 9. 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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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전국고교축구선수권 결승전을 보고 왔다. 노련한 프로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드리블은 투박하고 패스는 중간에 툭툭 끊어지는데도 모두가 비장하다. 이날은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거센 비가 내렸다. 빗물 웅덩이 때문에 공이 나아가지도 않았다.

영등포공고는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3학년 이예찬이 8강전을 마치고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1부 리그) 포르티모넨스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아 떠나야 했다.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유럽 진출의 기회. 그런데도 이예찬은 “안 간다. 우승하고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다른 선수들은 “우승한다고 약속하겠다. 우리를 믿고 너는 유럽으로 떠나라”라고 했다. 밤새 싸운 끝에 이예찬은 눈물을 흘리며 날아갔다.

몸이 바스러지게 뛴 영등포공고는 후반 21분 코너킥을 골로 연결시키면서 1대0으로 승리했다. 선수들은 장대비 속에서 활짝 웃으며 손가락 4개를 펼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예찬의 등번호 4번을 나타낸 것이다. 포르투갈에 있던 이예찬은 소셜미디어에 이 사진과 함께 “고맙다”라고 짧게 썼다.

낭만적인 경기를 보고도 돌아오는 길은 씁쓸했다. 이렇게 내일이 없을 것처럼 뛰고도 현역 생활을 접는 고교 선수가 많다. 본인 재능을 확신하지 못해서다. 한 해 고교 축구 선수 중 프로의 길로 가는 사람은 28% 정도. 셋 중 둘은 일찌감치 선수의 꿈을 접는다는 통계다.

상당수는 ‘천재를 맞닥뜨렸을 때’ 포기를 결심한다고 말한다. 시·도에서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이 전국대회에서 큰 벽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국내 프로에서도, 해외에서도 누구든지 언젠가 그런 때가 온다고 한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천재를 만나기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만화가 이현세도 살면서 천재들을 만났다. 그는 “나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친구는 한달 내내 술만 마시다가 휘갈기는 원고로 내 것을 휴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돌파구를 찾았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멈춰 버린 천재를 추월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고 했다. 이현세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어딘가 하나씩 모자라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렸다.

K리그 광주FC의 이순민도 그 길을 갔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 데뷔하는 선수가 넘쳐 나는 요즘, 이순민은 대학교 4년에 공익 근무까지 마치고 26세에야 처음으로 K리그 경기를 뛰었다. 묵묵히 정진하던 28세에 ‘공간을 가지면 공이 저절로 온다’는 깨달음을 얻고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지금은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어 지난달 생애 처음으로 A대표팀에 발탁됐다. 그는 “포기할까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현실이 가장 안 믿기는 건 바로 나 자신”이라고 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기만성형’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드물지도 않다. 이들의 공통점은 조급해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뛰어넘겠다며 경쟁심에 불타지도 않았다. 그저 매일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웠을 뿐인데 어느샌가 인정받아 놀랐다고 한다. 정말 그 일을 사랑하지만 재능의 벽 앞에 좌절했다면, 많은 생각 필요 없이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것도 정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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