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소위 진보는 우리 국민의 ‘정의감’을 배신했다
지난달 미국에서 날아온 뉴스 하나가 우리 모두를 뿌듯하게 해 주었다. 한국, 미국, 일본 3국 정상회담이 앞으로 연례행사가 된다는 발표였다. 이것은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톱클래스 선진국의 하나가 되었음을 세계에 공표하는 뜻깊은 뉴스였다. 문득, 이 민족이 살아 온 그 길이 떠올랐다. 35년간에 걸친 식민지 신세, 그를 벗어나자마자 두 동강 나버렸던 민족, 연이어 벌어진 민족 상잔의 비극, ‘보릿고개’라는 말이 상징하는 처절한 빈곤, 그것도 모자라 4·19, 5·18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독재 정권 상대 투쟁, 실로 가혹한 고난의 역사였다. 그런 나라가 불과 몇 십 년 만에 세계 톱클래스 나라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 전무후무한 비약,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핵심은 ‘민주화’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들어 민주화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으로 성장한 예가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독 대한민국만 그 어려운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가? 그것은 우리 민족성 덕분이라 생각한다. 어떤 ‘민족성’인가? 바로 ‘가치 중심적’ 민족성이다. ‘가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던질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기질이다. 왜 유독 그런 기질이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가? ‘민주화’란 한마디로 ‘독재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산물이다. 그러나 그 승리를 위해서는 대부분 대단한 국민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런 희생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기질, 그것은 ‘가치 중심적’ 민족이 아니고서는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우연히도 우리 민족에게는 바로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가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3·1 운동이다. 일제 치하에서 100만명 이상이 참여하여 5만여 명이 구속되었고 1000여 명이 사망한 세계사에 유례 없는 초대형 봉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민족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는 급기야 군대까지 창설해 실제 일본군과 여러 번 전투까지 벌였다. 독립 후에도 이 민족의 피는 계속 굴기했다. 4·19, 5·18 등이 그 예다. 이런 피와 땀과 눈물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것이다. ‘가치 중심적’ 국민에게만 오는 선물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우리 민족만 그럴까? 나는 ‘유교’라는 종교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는 이웃 나라 조선으로 건너와서 끝내는 국교가 되어 버렸다. 유교의 특징은 그 교리가 개개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장남은 생업을 전폐하고 그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무려 3년간 그 무덤을 보살펴야 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마을로 돌아오면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수많은 장남이 그 3년 동안 병사했지만 아무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선조들이 500년을 그렇게 산 것이다. 그 ‘가치 중심적’ 기질이 3·1 운동, 독립운동, 4·19, 5·18 등 민족적 궐기의 원천적 힘이었던 것이다.
‘가치 중심적’ 민족성 이야기는 작년의 우리 대선과도 관계가 있다. 작년 대선에서 집권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근본 원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작년 대선 이전에 당시 해외 정치 전문가 다수는 집권 민주당의 승리 쪽에 무게를 두었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내내 ‘마구 퍼 주는’ 소위 포퓰리즘 정권이었고 특별한 스캔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대 후보는 100% ‘정치 아마추어’ 아니었던가? 한마디로 작년의 대선 결과는 세계 민주 정치사에 대단한 이변이었다.
그렇다면 진보의 대선 실패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나는 우리 ‘진보 리더들’의 한 가지 큰 ‘무지’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가치 중심적’인가를 그들은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심이 된 민주당 리더들은 5년 내내 자신들의 그 과격한 ‘포퓰리즘’ 정책이 궁극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고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공영방송 장악’이라는 거대한 무기까지 있지 않았나?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우리 국민 다수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그 무자비한 ‘퍼주기와 내 편 챙기기’가 국민의 ‘정의감’을 위반한 것이다. 그래서 작년 대선은 많은 국민에게 일종의 ‘구국 운동’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정말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래서 그 대단했던 ‘포퓰리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사실 더 큰 문제에 봉착해 있다. ‘진보’에게서 그 실패나 오판에 대한 반성이나 자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대선 이후 그들의 ‘가치 무시적’ 성향은 도리어 더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진보’는 ‘보수’와 함께 역사라는 수레의 양쪽 바퀴이다. 두 바퀴가 같이 제대로 돌지 않으면 그 수레는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나라에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것은 ‘진보’의 각성과 변화다. 그 변화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대단히 ‘가치 중심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글에 대해 정파적 동기를 의심할까 봐 개인적 이야기를 한마디 덧붙인다. 이미 밝힌 대로 2000년 총선 때 나는 당시 만연해 있던 ‘호남 편견’에 대한 항의 표시로 당시 보수 신한국당의 서울 ‘강남 을’ 지역 공천 제의를 거절하고 민주당으로 ‘강남 갑’에 출마했다. 낙선 후 당시 이해찬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뜻이라며 입각을 제안했다. 나는 그렇게 되면 내가 호남을 이용해 ‘개인적 장사’를 한 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 감사한 마음으로 정중히 사양했다. 몇 년 후 이명박 대통령이 입각을 제의했을 때도 당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라 생각해 깊은 감사와 함께 사양했다. 이런 기반에서 내가 지금 이 나라 진보파에게 꼭 던지고 싶은 한마디는 이것이다. “그대들이 보여 주고 있는 이 모습들, 한마디로 너무나 대한민국스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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