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의 생각] 꼰대세상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2023. 9.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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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대부분의 생각이 학습에서 출발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이가 많아지면 경험에 의존하는 면이 훨씬 많아진다. 경험에 바탕을 둔 예견은 대체로 들어맞는 수가 많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현정부 주요 구성원들은 장차 처절하게 응징당할 것이다. 논리와 분석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수십 년 경험치에 의존한 생각이다. 전직을 처벌하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같은 당이 정권을 승계하든 교체가 일어나든 마찬가지다. 경제 폭락, 안보위기 심화, 국가위상의 심대한 하락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큰돈을 걸고 내기를 해도 좋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대통령발 흉흉한 뉴스들을 갑자기 수습하고 이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무려 국민 35%에 이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악한 공산 전체주의 세력을 무찌르는 똘이장군의 용맹한 무용담이 어떻게 귀결될지 정말로 안 보인다는 말인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같은 예견. 오랜 경험에 입각해 갖게 된 확신이 곧 꼰대스러움, 꼰대정신의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어디 나가 발언만 하면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꼰대, 꼰대’하는 놀림과 비아냥의 댓글이 난무한다. 만성이 돼서 그러려니 하고 별 감정도 일어나지 않건만 가끔 생각해 본다. 경험에 따른 확신을 갖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앞날에 대한 예견을 미지의 영역으로 미루어 두고 섣부른 판단 자체를 삼가야 할 일인가.

요 며칠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기사 중 하나가 “그래봐야 이준석은 3개월짜리다”는 대통령의 과거 통화녹취 내용이다. 소위 국가원수가 시정잡배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쯤은 이미 익숙해졌다. 교양과 지적 수준이 학력 경력과 별 상관이 없다는 좋은 예증이니 그나마 긍정적 기여를 하는 셈이랄까. 그런데 당사자 이준석이 라디오에 출연해 하는 발언이 흥미롭다. 애초에 일도 함께 해보기 전에 무조건 적개심을 갖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자기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준석 씨, 정말로 몰라서 모르겠다고 하는 건가요? 입당해 당대표를 3개월 안에 끝장 내 버리겠다는 저 무시무시한 적개심은 바로 꼰대들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른바 ‘위아래도 몰라보는’ ‘어린놈의 당대표’에 대한 분노.

TV에서 연예인들이 킬킬거리며 예능을 한다. ‘너, 데뷔 연도 언제야?’ ‘꿇어!’ 그러니까 누가 먼저 데뷔했는지가 위와 아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니 어디 꼰대가 나이 든 사람만의 전유물일까.

정말 몇 십 년째 갖고 있는 의문이 있다. 왜 학교 시절 먼저 입학한 상급학년에게 존댓말을 해야 하고 윗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건가. 그저 우연에 의해 먼저 태어난 것뿐이지 그가 나의 윗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라고 가르치는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나이가 들었든 어리든 각기 사람 나름이지 나이가 많으면 아무 이유 없이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옳은 건가.

현 정부에 대한 비관적 미래전망에서 출발해 꼰대론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온 이 생각을 수습해 보자. 나는 인간 윤석열이 돌연변이성 특이한 집권자가 아니라 한국의 한 측면의 정확한 반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금력 권력에 대한 절제 없는 무한 탐욕, 무교양 몰지성적 언행, 학벌과 집안을 배경으로 한 몰상식한 특권주의, 상전의식, 청소년기에 형성된 냉전적 적대감의 극복 부재, 힘센 존재에 대한 사대적 의존성과 비굴함, 니 편 내 편 갈라치기의 막무가내 습성, 어제 한 말 오늘 한 말 달라도 힘으로 찍어 누르면 통한다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꼰대주의라고 정리하자. 그렇다. 현재 한국은 꼰대들이 세월을 만나 무한권력을 휘두르며 열심히 뒤로 달려가는 중이다. 미국에 사대하고 일본에 굴종하고 중국 러시아와 적대하면서 언제 지뢰가 폭발할지 아슬아슬한 나날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확신에 차서 하고 있는 나 자신마저 나이 많은 꼰대에 불과하니 그저 이 모든 판단과 예견이 죄다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족 하나 달자면, 사람이 위아래가 있다고 믿는 점은 진보세력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소위 선배를 극진히 모시고 후배를 위한다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서 파생된 상하의식이 민주당 안에도, 진보단체에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모기소리로 외친다. 전국의 학교장들아. 이 꽉 막힌 사회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전교생 반말쓰기부터 시행하라. 본래 모두가 존대어 쓰는 게 옳으나 우리 구어에서 존대는 너무나 고루하고 형식적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평어를 쓰는 훈련부터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뭐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그저 궁시렁대는 꼰대의 한마디다.

※외부 필자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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