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3> 수이전-박인량(?~1096)
- 신라말 지은 국내 첫 서사자료집
- 아쉽게 원전은 남아있지 않고
- 후대 여러 문헌 인용으로만 확인
- 내용 엇갈리고 분량도 제각각
- 죽통서 나온 미녀를 본 김유신
- 여왕 흠모하다 죽은 평민 사내
- 알에서 태어난 탈해 신화까지
- 설화·전기·일화·기담 12편 담아
- 국문학적으로 중요한 무형자산
- 원전 없어 과대평가 경계 시선도
타임머신을 타고 7세기로 날아가 신라 어전 회의에 참관하게 되었다면? 다음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다.
우리나라 첫 여성 군주가 보인다. 웬 그림을 응시하는 그녀는 갓 등극한 선덕여왕(?~647). 신하들은 여왕이 입을 떼기를 기다린다. 그림은 당 태종(598~649)이 즉위 축하 선물로 보내왔다. 모란 그림이다. 모란 씨앗도 받았다. 선덕이 그림에서 눈을 뗐다. 미소를 짓는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선덕: 태종은 여자인 내가 보위에 오른 걸 빗대고 있구나.
신하: 어찌 그리 생각하시나이까?
여왕: 꽃 중 여왕이라는 모란 아닌가. 하지만 꽃을 찾는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았구나. 향기 없는 꽃이라는 뜻이다. 짐이 홀몸이라는 걸 희롱한 게 아니겠는가.
시간이 흘렀다. 궁궐 뜰에 심은 모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마침내 꽃을 피웠다. 신하들은 여왕이 했던 말을 떠올리곤 꽃 냄새를 맡아보았다. 과연 향기가 나지 않았다.
▮고대 첫 서사 자료집
이 사적(史蹟)을 두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재위한 첫해(632년)에 일어났다고.
고려 승려 일연은 충렬왕 7년(1281년) 이 역사서를 지었다. 선덕여왕 편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출전은 신라 말기인 7세기께 집필됐으리라 추정하는, 최초 원본 ‘수이전(殊異傳)’이다. 책 이름은 ‘기이한 것을 전달한다’는 뜻.
수이전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첫 고대 서사 자료집이니 국문학이 보인 첫 얼굴이다. 의의가 각별하다. 아쉽게도 원전이 확인되지 않는다. 후대 여러 문헌이 인용했지만, 내용이 엇갈리는 이유. 축약 혹은 가필돼 분량이 다르다. 수이전 내용을 인용한 고서는 여럿이다. 13세기 해동고승전(각훈) 삼국유사(일연), 15세기엔 태평통재(성임) 필원잡기(서거정) 삼국사절요(노사신)다. 16세기는 대동운부군옥(권문해), 17세기 해동잡록(권별). 이들 문헌은 모두 합쳐 21편을 전한다. 중복을 빼면 12편.
‘우리나라 첫 설화집’으로 흔히 소개하는 수이전에는 설화 외에도 전기 일화 기담이 담겼다. 선덕여왕 편은 전기+기담+설화. 수이전 내용은 후대 인용 문헌에서 다소 변한다. 그 모습은 국문학 성장 과정이다. 사건 중심인 서사물로 틀을 잡아가는 게 공통점. 그런 추이가 선덕여왕 편에서 뚜렷이 보인다. 인용 문헌 중 하나인 삼국사절요는 ‘모란 얘기’만 다뤘다. 59자 한자로 짧게 썼다. 삼국유사(권 1)는 그 내용이 훨씬 자세하고 풍성하다.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善德女王知幾三事)’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다른 두 가지 얘기를 덧붙였다.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들이 사나흘 울어댄 변고(여근곡 편), 여왕이 생전에 자신이 이승을 떠날 날을 이미 알고 장지를 지정한 일(도리천 편)이다. 선덕여왕은 이 세 가지 일을 꿰뚫어 보았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군주로 후대 민간 설화에 등장할 만하다. 보물 198호인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이 그 증거다. 높이 1m인 이 신라 석불은 온화한 미소가 돋보이는데, 선덕여왕 모습을 새겼다는 전설이 따른다.
수이전에는 선덕여왕과 얽힌 또 다른 얘기가 보인다. ‘지귀(志鬼)’ 편이다. 지귀는 여왕을 흠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신라 평민 사내. 지귀는 여왕을 직접 만날 기회를 놓친 후 통탄하다 눈을 감아 억울함을 안은 불귀신이 됐다. 선덕은 그를 위로하는 제문을 짓게 했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영험한 방화(防火) 주문으로 썼다고 전한다.
▮ 책을 완성하는 건 상상의 여백
수이전 원문이 없어 상상력은 날개를 편다. 12편 얘기는 저마다 상상력이 헤엄칠 여백을 품었다. 현대 독자가 느끼는 수이전 매력은 여기서 나온다. ‘죽통미녀(竹筒美女)’를 보자. 고문헌 연구 학자는 단순한 도술 기담이라고 평가하지만, 일반 독자는 자못 흥미롭다. 내용은 이렇다. 김유신은 서주(충남 서천)에서 경주로 돌아올 때 길에서 기인을 만난다. 범상찮은 기운이 감도는 남자다. 유신은 자는 척하며 실눈으로 그를 지켜보는데 그가 품에서 대나무 통을 꺼낸다. 그 통을 흔들자 두 미녀가 통에서 나와 기인과 얘기를 나누다 다시 통 안으로 들어갔다. (후략) 이 얘기를 대동운부군옥(권 8)으로 옮겨 놓은 편찬자는 조선 선조 때 문신 권문해(1534~1591)다.
수이전에는 유명한 인물이 여럿 나온다. 그중 고운 최치원(857~?)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졌다. 최치원 편은 태평통재(권 68) 해동잡록(권 4) 대동운부군옥(권 4) 등 세 문헌에 실렸다. 이 얘기는 수이전 12편 중 빼어난 후대 창작 설화로 꼽힌다. 태평통재에 실린 글이 가장 길고 자세하다. 화답하는 한시가 줄을 잇고, 등장인물 간 대화에선 문학성이 도드라진다. 태평통재는 최치원 편 앞뒤에 고운 전기를 붙였다. 12세에 당나라에 건너간 고운은 874년 그곳 괴과(魁科)에 합격해 율수 현위 벼슬을 얻는다. 그는 어느 날 율수현 남쪽에 자리 잡은 명승지인 초현관에 놀러 간다. 그곳에서 쌍녀분(雙女墳)으로 불리는 오래된 무덤 앞에 서서 묵념한 뒤 시를 지어 바치고 관으로 돌아온다. 적막한 야밤이다. 어디선가에서 손에 붉은 주머니를 쥔 여인이 나타나는데…. (후략)
불교와 관련된 얘기가 수이전에 다수 담겼다. 아도(阿道)·원광(圓光)·보개(寶蓋) 편이다. 아도는 위나라 현창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고 신라에 불도를 전한 고승. 그는 미추왕 왕녀인 성국 궁주가 앓던 병을 치료한 후 경주에 흥륜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주 사정동 흥륜사지(국가사적) 주변에서는 공양구 유물이 발굴된다. 원광 법사는 중국에서 삼장(경·율·논)과 유학을 익히고 돌아와 항상 대승 경전을 강독했다는 고승. 보개는 신라 여인이다. 그녀는 출타한 아들 장춘이 한 해를 지나도 행방이 묘연해 애가 탄다. 어머니는 민장사 관음상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얼마 후 아들은 죽음 문턱에서 법력 도움을 받아 집으로 무사 귀환한다.
‘영오세오(迎烏細烏)’ 편은 이렇다. 동해 가에 살던 부부 영오·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가 작은 섬 군주와 왕비가 돼 그곳을 다스린다.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마자 신라엔 해와 달이 사라졌다. 세오가 짠 비단을 신라로 가져와 제사를 지내자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일월 전설이다.
‘수삽석남(首揷石枏)’ 편은 신라 남자 최항이 애첩과 나눈 사랑 얘기. 최항 혼령이 머리에 진달랫과 관목인 석남을 애첩과 나눠 꽂고 만났다. 후대 시인이 석남을 소재로 사랑가를 읊었다면 그는 이 수삽석남 편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탈해(脫解)’ 편은 용성국 왕비가 낳은 알에서 나온 탈해가 신라 2대 해남 왕의 부마가 된다는 신화로 널리 알려진 얘기다.
‘노옹화구(老翁化狗)’ 편은 김유신이 주인공. 유신이 집으로 초청한 늙은이가 둔갑을 거듭해 개가 된 후 나가 버렸다는 얘기다. ‘호원(虎願)’ 편은 흥륜사 탑돌이를 하다 신라 남자 김현과 부부 인연을 맺은 호랑이가 자기를 희생해 남편을 돕는다는 보은 설화에 속한다.
수이전을 두고 학계 일각은 과대평가 말라는 목소리를 낸다. “원형이 없는 짧은 글 12편은 기담을 전하는 데 주목적을 둔 우리 첫 고대 서사물이다.” 전체가 높은 문학성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진단. 수이전을 읽을 때 필요한 지적이다. 그렇더라도 수이전이 빛을 잃는 건 아니다. 고대 선조가 살았던 시기로 올라가 그들을 만나보게 해주니 어느 시대, 다른 나라 어떤 서사 작품과는 ‘대체 불가능한’ 이 땅 무형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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