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한국인들이여, 변방의 중국몽에서 깨어나라,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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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래 한국 지식인은 1949년 이후의 중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암묵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며 문화대혁명은 말년의 실수 같은 것이라 치거나 그마저 옹호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것이 전 정부의 친중사대주의로까지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586세대이면서 “중국은 그렇지 않다”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학자가 나타났습니다. 송재윤(54) 캐나다 맥매스터대 역사학과 교수입니다. 그가 최근 방대한 분량의 저서 ‘슬픈 중국’ 3부작을 완간했습니다. 2020년 1부 ‘인민민주독재 1948-1964′, 2022년 2부 ‘문화대반란 1964-1976′에 이어 3부 ‘대륙의 자유인들 1976-현재’를 낸 것입니다.
3부는 마오쩌둥 사후 중국 정부가 경제 성장을 이루고 화해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 안팎에서 자유를 외치는 인민들의 저항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총력전’이란 미명하에 전개된 최근 3년 동안의 전체주의적 방역 정책의 실태도 기록했습니다. 그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책 완간을 계기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와 인터뷰한 내용은 최근 신문 지면에 기사로 실렸습니다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얘기가 누락됐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전문(全文)을 싣고자 합니다. 대단히 긴 분량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뭐라고? 작은 산봉우리가 중국몽에 동참하겠다고?”
―'슬픈 중국’ 3부작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2015년에서 2016년까지 1년간 연구년을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19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16년 만이었죠. 그때 서울에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놀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중국 경제가 곧 미국을 꺾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고 전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정치체제가 ‘풀뿌리 민주주의와 엘리트 능력주의를 결합한 합리적 통치 시스템’이라는 평가도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서 급속히 유포되고 있었죠. 인터넷 언론 검색만 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은 다시금 친중 사대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첫 책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였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급기야 2017년 12월 1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이고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몽(中國夢)에 동참하겠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때 그 장면을 캐나다에서 실시간으로 보면서 저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국가원수로서 외교의 프로토콜을 완전히 벗어나는 터무니없는 ‘과공(過恭)의 비례(非禮)’일 뿐만 아니라 ‘중국몽’에 대한 암흑 같은 무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몽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입니다(송 교수는 이것이 중국 우선주의, 인권탄압, 패권주의의 논리가 담긴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인들 앞에서 ‘전(全) 한국을 이끌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가요?
대체 그 원고를 누가 썼을까? 당시 청와대는 무엇을 했나? 외교부는 어떻게 그런 비상식적인 발언이 대통령 연설문에 들어가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그 바로 전날 한국 기자단 10명이 중국 경호원에게 야만적으로 폭행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었습니다. 대통령 수행 기자단이 중국에서 경호원들에게 짓밟히는데, 한국 대통령의 입에서 어떻게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말이 나오는가요? 며칠 후 캐나다 한인 교포들과 모여서 만찬을 하는데, 그중 한 명이 놀랍게도 ‘기자 녀석이 맞을 짓을 했다’며 중국의 폭행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며칠 고민하다가 ‘현대 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한국어로 써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한국식 교육을 받았고, 현역으로 군 복무를 완수했으며,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외국 생활을 했지만, 저는 아직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관한 역사서는 부지기수지만, 특히 한국 사회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근거해서 현대 중국의 정책 실패와 정치범죄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왜곡된 정보, 그릇된 환상, 허황된 전망을 쏟아내는 언론들이나 소위 중국통 전문가들에 맞서서 중국의 실체를 밝히는 지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자각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해인 2018년 1월부터 한 인터넷 매체에 ‘문혁춘추’란 제목으로 1948년 이래 중국 현대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민의 나라’가 인민들을 학살했다
―책 제목 ‘슬픈 중국’의 ‘슬픈’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원래 마음속에 갖고 있던 제목은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였는데, 제1권 출판 직전에 심상대 작가의 조언에 따라 ‘슬픈 중국’으로 바꿨습니다. 왜 하필 ‘슬픈’이란 형용사가 붙었냐면, 이 3부작에서 낱낱이 밝힌 참혹하고 광포(狂暴)했던 중국 현대사의 전 과정을 살펴보시라 말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했던 중국 인민의 뼈아픈 체험에 공감할 수 있다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중국 인민의 뼈아픈 체험’이라는 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수치를 들자면, 1950년대 초반 숱한 정치 투쟁에서 최소 100만에서 최대 500만 명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서 처형됐고, 반우파 운동 때는 최소 55만 명의 지식인들이 잡혀가서 길게는 20년 걸쳐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1958년~1962년 대기근이 닥쳤을 땐 3000만에서 4500만 명이 주린 배를 잡고 얻어맞으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쓰러져 죽어야만 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밝힌 바로는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인민이 정신적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톈안먼 대학살 때는 대체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30년이 지나도록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소 300명, 최대 1만 명 넘는 인원이 전국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중국은 전국적으로 1억 명 이상이 몇 달씩 집안에 감금당하는 소위 ‘대륙봉쇄령’의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서울·경기 지역과 인구가 비슷한 상하이 지역 2600만 명이 시진핑 1인의 명령에 따라 5개월 동안 집구석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중국입니다.”
―하지만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경제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인민들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된 상황이 아닌가요?
“문제는 그렇게 많은 학정, 폭정, 실정을 거듭했는데도 최근 200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성장이 이뤄지자 중국공산당은 그 모든 성과를 통치 능력이라 선전한다는 사실입니다. 3권 ‘대륙의 자유인들’에서도 썼지만, 중국에서 민간 기업이 GDP의 60%, 혁신의 70%, 도시고용의 80%, 새 일자리의 90%를 담당해 왔습니다. 중국 공산당 ‘덕분’에 중국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니고, 중국 공산당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장 시진핑 ‘일인천하’가 되니까 중국 경제는 봉쇄를 푼 이후에도 바닥 아래 바닥을 뚫고 꺼지는 모양새가 펼쳐지지 않습니까?”
―현재 중국이 덩샤오핑이 이룬 것마저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들에게 정치 활동만 포기하면 경제적 번영이 따른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공산당 일당독재가 아니라 민간 경제의 약진 결과 중국식 개혁개방이 성공했습니다. 그 점을 잘 알기에 2001년 7월 장쩌민은 기업가들에게 중국공산당 가입을 허락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일부 중국의 붉은 자본가들(red capitalists)은 글로벌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죠. 시진핑 정권의 권위주의적 정책은 바로 그러한 공적 신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제로-코비드 정책의 결과 중국의 가계와 자영업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투자와 소비를 꺼리고 현금을 붙들고 있게 됐습니다. 그 결과 2022년 12월 제로-코비드 정책이 끝났음에도 극적인 경제적 반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지금 중국 공산당은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암묵적 전제를 깨서 공적 신뢰를 깎아먹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진핑은 중공 내부 규율을 깨고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 역시 덩샤오핑의 지혜를 거슬러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는 시대착오라 할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와 시진핑 시대 모두 중국은 전체주의 국가라는 것입니까?
“오늘날 중국은 14억 인구 개개인의 생체 정보를 빅데이터로 집적하고, 전국에 감시 카메라를 틀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나라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종교의 자유도, 거주이전의 자유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결국 못 견디고 정치적 망명을 하거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저는 1995년 처음 중국에 간 후 30년 가까이 우정을 쌓아 온 중국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크기에 더욱더 나는 현대 중국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슬프게만 느껴집니다.”
◇”한국 지식인들, 여전히 모화주의(慕華主義)에 빠졌다”
―1980년대 많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중국(중공)은 이상적인 체제인 것처럼 비쳐졌습니다.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이 필독서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마오’는 우상화됐습니다. 그래서 톈안먼 사태 당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대학 시절 중국사 교양 수업을 수강했는데, 20대 후반의 젊은 강사는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 기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1937년에 출판된 공산 게릴라 투사 마오쩌둥의 전기입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40대 중반의 공산주의 혁명가였습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이후부터 1976년까지 27년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시기에 중국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균형 감각이 있는 역사 교사라면 수강생 모두에게 이 책 하나만을 읽고 독후감을 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가 분위기는 그렇게 왼쪽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970~80년대 한국 지식계는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그 환상은 리영희의 ‘이성과 우상’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같은 중국 관련 시사 평론집을 통해서 퍼져 나갔습니다. 리영희의 책이 그만큼 널리 읽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책들이 그 당시 국제 학계는 고사하고, 한국의 학술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거짓, 오류, 과장, 왜곡, 편파적 평가의 언어로 점철돼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중국을 제대로 보며 분석하는 학자가 존재했다는 말씀입니까?
“그 당시 신문 자료를 살펴보면, 1960~70년대 한국 대표 언론들은 외신 보도를 정확하게 받아서 문화혁명을 겪고 있는 중국의 실상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고 충실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이홍영 교수나 안병준 교수처럼 영어권 학계에 문혁 관련 학술서를 발표한 전문가들도 있었으며, 1976년 중반 한국에서 오병헌 교수처럼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적으로 탐구한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리영희라는 비전문가의 시사평론집이 그토록 널리 읽혔을까? 이에 대해선 앞으로 연재할 ‘변방의 중국몽”에서 심층적으로 밝힐 예정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하나씩 말씀해 주시죠.
“첫째, 한국인의 뿌리 깊은 반서구주의와 반미 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화 제국의 조공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일종의 ‘백화론(白禍論·White Peril)’을 갖게 됐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구미 백인들이 황인종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생겨난 황화론(黃禍論·Yellow Peril)에 대비되는 심리적 공포증입니다. 20세기 초부터 범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권 등 일본 지식계에서 만들어낸 아시아 연대론이 중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한 오랜 지적 경향성이 한국 지식계에도 면면이 내려왔다고 사료됩니다. 중국 현대사의 기본 사실을 왜곡과 과장으로 거침없이 미화한 리영희의 저작들은 역사가 아니라 ‘중국 신화’였습니다. 그런 중국 신화가 반미 성향의 한국인들에게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대체 문명의 판타지를 제공했습니다.
둘째, 한국 지식계의 뿌리 깊은 사회주의 성향입니다. 중국이 사회주의가 된 이유도 비슷한데, 근대 문명이 무엇인지, 구미 자유 민주주의가 어떤 체제인지 잘 알 수 없었던 20세기 초중반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디폴트로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사회주의의 내러티브가 개인의 소유욕, 경제적 자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자유주의의 내러티브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한국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지식인들은 더더욱 중국을 동경하고 흠모했던 듯합니다.
셋째, 한국에서 반(半)천년 이어진 모화(慕華)사상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역사의 유습은 오래도록 남아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문화사에서 소위 망탈리테(Mentalité)라 부르는 공동체의 뿌리 깊은 정신적 관성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들, 특히 노론 권력자들은 병자호란 이후 점점 더 노골적으로 숭명(崇明) 의식을 강화해 갔습니다. 만동묘(萬東廟)를 세워서 명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망해버린 남명(南明)의 역사를 쓰기도 하고…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의 건립을 선포했지만, 스스로 퇴위하던 1907년까지 대보단에서 1년에 네 차례씩 명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실로 역사에 전례가 없는 기막힌 ‘소(小)중화 근본주의’가 한반도 권력층의 의식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유습이 오늘날의 한국에까지 이어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재도 ‘미국이 아니라 옛날처럼 중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전직 대통령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쓴 책 홍보에 나서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16년 언론 인터뷰에서 한 유명 철학자는 ‘미국은 50년 우방이지만, 중국은 5000년 우방’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제 미국만 죽자 살자 따르지 말고 중국 쪽에 서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중국이 5000년 우방이라는 발언은 전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발언은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 깊은 반미친중(反美親中)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표출한 점에서 그 의미가 심장합니다.
한국 지식인들이 미국보다 중국을 신뢰한다면 그 이유는 경험적으로 치밀하게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중국을 만든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절대로 그런 식의 여과되지 않은 친중국 옹호 발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경험적 현실을 떠나 관념으로서의 중국을 존숭하는 태도 역시 편향되고 고립된 조선 사상사의 영향입니다.”
◇”중국을 맹종하기 전에 공부 좀 하라!”
―'중국의 역사가 그렇게 화려하고 숭고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까?
“고대 중국 문명은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입니다. 은허 갑골문에서 그 유래를 확인할 수 있는 한자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기원전 221년 진(秦) 제국의 성립에서 틀이 갖춰진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인류 문명사 최장의 중화 제국을 지탱했던 성공적인 통치 시스템이었습니다. 방대한 영토의 다양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해 장시간에 걸쳐 독특한 문화를 창달해 온 대단한 문명임엔 틀림없습니다. 그 밖에도 눈부시고 화려한 중화 문명의 실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공산당 일당독재를 넘어 시진핑 일인 지배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1949년 이래 중국의 현대사를 이념적으로 미화하고 정치적으로 칭송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유의 신장, 민주의 확대, 인권의 보장, 법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중국은 후진국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저명한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1936~2012)는 중국 학생들을 향해서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말고 스터디(study)를 하라’고 했습니다. 중국을 미화하고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충언하고 싶습니다. ‘중국을 사랑하지 말고 스터디를 하라!’
현대 중국의 슬픈 역사에는 눈을 감고서 무조건 중국이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면, 맹목이고 맹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배 권력자들이 명나라를 존숭했는데, 과연 그들이 명나라의 역사를 얼마나 공부했습니까? 만력제가 국사도 내팽개치고 향락에 탐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송시열은 만력제를 성군이라 칭송할 수 있었을까요? 명 태조 주원장이 집권 후 수만 명을 도륙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개항 이후까지 만동묘에서 명태조를 흠모하며 고두(叩頭)하면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현대 중국의 어두운 역사를 조금이라도 탐구해본 사람은 절대로 중국을 신봉할 순 없습니다.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중국의 현대사에 그토록 많은 과오와 문제점이 있었다면, 수억의 인구가 1949년 ‘그 체제’를 택한 이유는 뭘까요? 저는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시신을 참배하려고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긴 줄을 선 것을 보고, 그리고 간쑤성(甘肅省)의 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여학생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묻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마오쩌둥’이라 대답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고, 서울에서 유학하는 중국인 대학생으로부터 “다른 나라가 왜 민주화를 빌미로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느냐”라는 항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중국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치열한 내전을 거쳐서 형성된 나라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군사적으로 전 중국의 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에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톈안먼 성루에 올라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중국 공산당이 인민의 지지를 얻었기에 초반의 약세를 극복하고 거대한 국민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중국 공산당의 선전일 뿐입니다. 장제스는 8년간 일본과의 전쟁을 거의 도맡아 치렀기에 일제가 패망했을 무렵 국민당군은 극심한 전쟁 피로를 겪고 있었습니다. ‘슬픈 중국’ 1권 앞부분에서 상세히 밝혔지만,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미 군사적으로 전 중국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정부수립을 승인받는 민주적 절차는 밟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군사적 점령으로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도 군사적 점령을 통해서 명을 세웠고, 만주족 역시 군사적으로 중원을 점령했습니다. 그 점에선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과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1911년 청 제국이 붕괴한 이래 중국은 거의 40년간 극심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군벌 시기 중국에는 1300여 명의 군벌들이 등장해서 140여 차례의 성급(省級) 전쟁을 벌였습니다. 국공내전은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그러한 분열과 내전을 종식한 공로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국 인민 대다수가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마오쩌둥을 존경하게 된 배경을 보면, 중공 중앙선전부의 선전·선동이 먹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픈 중국’ 제3권에서 다루지만, 리훙린이란 중국의 역사가는 공산화 이후 중국 현대사는 끊임없는 ‘사상 운동’의 과정이라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상 운동이란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을 적인(敵人)으로 몰아서 숙청하는, 정부가 주도해서 인민을 동원해 전개되는 정치 숙청의 캠페인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민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은 끊임없이 강화됐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도 ‘반(反)자유화’의 과정은 단계적으로 심화됐습니다. 시진핑 정권 이후엔 더더욱 그러합니다. 중국은 14억 인구를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통제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의 저항도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작년 11월 말 그토록 강력한 정부의 통제를 뚫고서 20여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젊은이들의 백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손에 흰색 A4 종이를 든 청년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시진핑은 물러가라, 공산당은 물러가라!’를 외쳤습니다. 1989년에도 ‘덩샤오핑은 물러가라’는 구호는 있었지만, 공산당 물러가라는 구호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노인들도 거리에 나와서 ‘공산당 국제가’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 첫 소절이 ‘노예들아, 일어나라’입니다.
중국인들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전체주의적 국가 통제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각자도생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산당보다 더 무서운 건 ‘대륙의 자유인’
―이번 ‘슬픈 중국’ 3부의 부제는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1976년부터 오늘날까지 중국 사회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자유화, 민주화의 흐름을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사상을 통해서 추적했습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중국의 지성계에서는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향한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했습니다. 1910년대 이미 중국인들은 톈안먼 광장에 모여서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었습니다. 1919년 5·4 운동의 시대정신은 바로 민주와 과학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자유, 인권, 민주, 법치를 부르짖으며 헌정 담론을 벌였습니다. 중국의 헌법에 들어가야 할 인류적 보편가치를 본격적으로 토론했습니다. 중국 헌정 담론의 역사가 이미 100년을 넘었죠. 중국에는 지금도 분명 자유를 열망하고 민주를 희구하는 자유인들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976년 4월 톈안먼 광장에는 최대 200만 인민이 모여서 문혁의 종식을 외치며 4인방의 체포를 요구했습니다. 그해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채 한 달이 못 돼 4인방이 긴급 체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난 민중의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1978년 12월 중국이 덩샤오핑을 추대하여 전격적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아간 데에도 집단 영농을 탈피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농민들의 저항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 개혁개방을 이끈 주체도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민간 자본가들과 농촌의 향진(鄕鎭) 기업이었습니다. 그들이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1980년대 한국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할 때, 중국에서도 민주를 향한 열망이 끓어올랐습니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일 때, 중국도 세계사적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그 열망이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됐지만, 중국 공산당은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민주화의 열기를 짓밟아 껐습니다. 탱크 부대 앞에서 사람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나 1990년대에도 꾸준히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2008년에는 303인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자유, 인권, 민주, 법치의 이념을 담아서 이른바 ‘08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에서 헌정 담론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보편적 인권 선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정 ‘대륙의 자유인들’입니다. 그 이듬해 08 헌장의 발표를 주도했던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는 2009년 구속됐고, 2010년 감옥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10년대 중국 지식계는 헌정 담론을 이어갔지만, 2013년 시진핑 정권은 공산당 기관지를 동원해서 반자유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019월 2월 시진핑 정권은 전 세계를 향해서 중국은 절대로 입헌주의, 권력분립, 사법부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안팎의 자유주의 세력을 위협했습니다. 권력 집중은 입헌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제주의의 출발점입니다. 시진핑 정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 이상의 찬성률을 만들어내며 중국 헌법의 국가 주석에 관한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말 시진핑 정권 제3기가 출범했지만, 지금 중국은 경제 위기의 조짐을 보입니다. 중국의 민심은 흉흉합니다. 이미 2016년부터 경제 위기가 배태되고 있었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권력이 막강해 보이지만, 역사에서 변화의 물꼬는 예고 없이 터집니다.”
―전망은 어떻게 될까요.
“섣부른 예측은 무모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중국을 냉철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다만 관찰에만 머문다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활약하는 ‘대륙의 자유인들’과의 국제적 연대가 절실합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활동가들은 세계를 향해 국경을 초월한 범인류적 연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대륙의 자유인들, 위구르족, 티베트족 활동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중국 공산당 정부보다 ‘대륙의 자유인들’의 함성이 더 무섭습니다.
◇”중국은 세계적 보편 이념을 창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경제 성장을 이룬 뒤 시진핑의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지금의 중국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시진핑 일인 독재가 더 부강한 중국을 만들 수 있다고 바라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습니다. 시진핑 일인 독재가 더 불안한 중국을 초래할 것이라 보는 전문가가 대부분입니다. 불안한 만큼 위험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적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중국의 경제적 상황이 불안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반중 정서는 더욱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중국은 세계를 설득할 보편 이념을 창출할 능력도, 의지도, 논리도 없습니다. 다만 비대해진 중국이 무작정 버티기로 나갈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중국 공산당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도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지루한 신냉전의 지구전이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비논리적이고 비정합적인 체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요구됩니다.
―저는 동북공정을 오래 취재하면서 ‘중화민국 대가정’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 같은 용어를 수도 없이 접했습니다.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계급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까지 포기한 이념적 빈곤이 드러난다고 책에서 말씀하셨는데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국 내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포함한 56개 민족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서언의 둘째 문장은 ‘중국의 각족(各族) 인민이 공동으로 광휘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 각족이란 한족, 조선족, 만주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등 56개 민족 각각을 이릅니다. 중화민족은 각족 인민 모두를 포함하는 중국 전체의 국민과 해외 거주하는 동포까지 포함하는 실로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몽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이 중화민족이라는 단일민족의 국가로 거듭나는 대목입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됩니다. 중화민족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중화국민’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중국 거주 모든 국민과 해외 거주하는 중국인 전체’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이 곧 국민이나 인민의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 공산당은 민족이란 단어의 뜻을 바꿔가면서까지 ‘중화민족’이란 표현에 집착할까요? 정치적 민족주의(political nationalism)를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대만인들과 홍콩인들은 스스로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 홍콩인이라 생각합니다. 중국공산당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중화민족’이라 말하는 셈입니다. ‘중화민족’은 개별 민족의 구분을 초월하는 통합적 민족입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념적으로 요청되는 초월적 집체주의라 할 수가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중화민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계급 갈등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현재 중국에서 계급 모순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드러납니다. 2020년 5월 국무원 총리였던 리커창은 중국에는 한 달 수입이 미화 140달러 이하인 6억 명의 빈곤층이 살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을 강조했습니다. 마오쩌둥 명언록에 ‘계급투쟁, 계급투쟁, 계급투쟁!’이란 구절도 있습니다. 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 대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칩니다.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계급으로 갈라쳤다면, 시진핑은 중국 인민 전체를 민족으로 ‘묶어친다’고 할 수 있죠. 이 정도 되면, 계급 정당이 민족 정당으로 둔갑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현재 중국 공산당이 처한 이념적 빈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족 화합을 외친다면 중국공산당의 당명을 ‘중화민족당’으로 바꿔야 하겠지만,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란 당명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오쩌둥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일당독재의 이념적 근거가 바로 공산당이라는 레닌주의 전위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일당독재를 위해서 공산주의를 내걸고는 국민 총동원의 필요 때문에 ‘중화민족’을 강조합니다. 이 정도 되면 이념적 빈곤을 넘어서 논리적 자가당착, 이념적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는 이뤄냈다, 중국을 비판하는 국제 연대를
―코로나19 사태는 중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 합니까?
“코비드 19 팬데믹은 전 세계에 중국이라는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가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일깨우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전 세계 반중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대다수 국가 등 세계는 중국 체제를 비판하는 비중(批中)의 이념 공조와 군사, 외교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억중(抑中)의 국제연대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5년 전엔 그런 조짐이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았었습니다.
중국은 2020년 초부터 2022년 말까지 제로-코비드 정책에 따라 꼬박 3년 동안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사에서 가장 강력한 방역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수도권 인구 2500만 명을 통째로 딱 일주일만 봉쇄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요? 민중 봉기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을까요? 중국 상하이에선 전 인민이 다섯 달 넘게 방구석에 감금됐습니다.
이번 책의 제3부 제목이 ‘대륙봉쇄령’입니다. 3년간 인민전쟁, 총력전이란 미명 아래 광적으로 전개됐던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방역 정책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러한 전체주의적 통제가 정당화된 중국 사회 특유의 역사적 배경을 돌아보았습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한 해도 쉴 틈 없이 전 인민을 동원하는 ‘인민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그 점에서 시진핑 정권은 마오쩌둥 정권의 부활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진정 이성의 마비이며, 독단적 시대착오이며, 광기의 대역진(大逆進)입니다.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지금의 중국은 최근 몇십 년 동안의 모습과 달라 보이는 낯선 얼굴입니다. 향후 중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그리고 한국은 어떤 대처를 해야 하겠습니까?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직후 일어난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을 탄압한 후,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사회주의 노선, 인민민주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반드시 견지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경제적 국제 공조를 강화해 경제 규모 세계 제2위로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이 천명한 ‘4항 기본원칙’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실제적으로는 그 네 항 모두 폐기된 지 오래지만, 이념적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더 이상 중국의 그러한 전체주의적 통치를 묵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번영할 수 있습니다. 시진핑 정부는 근본적 개혁은 미뤄둔 채로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국영 기업의 개혁이 필요할 때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외치다가 약발이 먹히지 않자 소비 확대를 부르짖습니다. 갈팡질팡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중국의 경제가 위험해지자 한국 경제에도 먹구름이 닥칩니다. 중국이 무너지면 한국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급속하게 퍼져 나갑니다. 실제로 중국발 경제 위기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위기에 대처해야 합니다. 우선 과거처럼 미·중 사이에서 애매하게 줄타기하면서 중간자 놀음을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미일 공조와 자유민주주의 국제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미 미국, 일본, 호주, 인도를 잇는 쿼드(Quad)와 미국, 영국, 호주를 결속하는 오커스(AUKUS)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반도체의 80% 이상을 생산하는 한국과 대만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이며, 최첨단의 산업 기지입니다. 한국과 대만은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모범 국가입니다. 바로 그 점을 믿고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지난 정권처럼 어설프게 중국 껴안기를 시도하면, 중국은 오히려 한국을 조롱하고 괴롭힙니다. 어리석은 이념적 방황은 끝을 내고, 대한민국 헌정사가 증명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당당하게 선양해야 합니다.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 외교관들을 만나서 자유, 민주, 인권, 법치라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말할 수 있어야 한국의 대(對)중국 지렛대가 생깁니다. 그것이야말로 외교의 바다에서 고래 틈에서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고래가 되는 정도가 아닐까요?”
◇중국은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돼야 한다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광주 출신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광주시의 기념 사업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주MBC가 2014년부터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사 보고 좀 웃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북한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그런 식의 이벤트를 기획할 수 없겠죠.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부정하고 기본 가치를 우롱하는 낡은 세력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 널리 퍼졌던 주사파 운동권의 ‘빨치산’식 역사관이 질기게 남아서 아동 교육에까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빨치산’식 역사관에 따르면, 남북분단의 책임은 ‘미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에 있으며, 김일성의 남침은 ‘반제(反帝) 민족해방’ 전쟁이자 사회주의 건설 운동이 됩니다. 마오쩌둥은 ‘지원군’을 보내서 유엔군에 밀려 패주하던 북한을 되살려준 그야말로 ‘항미원조(抗米援朝)’의 은인으로 인식되겠죠. 그렇게 보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을 ‘14억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는 광주 출신 영웅’이라 기리는 그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뻔히 보입니다.”
―'슬픈 중국’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5년여 전 ‘슬픈 중국’을 처음 기획하고 집필할 때 한국 지식계를 생각하면 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벽을 보고 절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게 다가와서 한국에서 친중은 이미 시대의 대세라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참혹한 현실을 파헤쳐서 글을 쓰다 보니까 점점 주변에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쓴 글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5년 전 세계의 대(對)중국 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이 세상의 기미 혹은 급변의 조짐을 읽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배수진을 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생각해주는 분들은 주변에서 ‘그러면 중국에 못 간다’ ‘한국 학계에서 소외당한다’ ‘미국 편에만 서지 마라’는 등 많은 조언을 해주셨지만, 저는 제가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한 바를 정직하게 말하는 게 학자의 직업윤리라 생각했습니다. 5년이 지나고 나서 그때 제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 밖의 학자들은 중국에 관해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충분히 보복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며,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내용이 학술적으로 엄밀하고 정확하다면 글로 쓰고 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학자의 책임이고 임무니까요.
지금까지 중국 정부나 친중 세력이나 제 책에 대해 무대응 전술을 쓰는 듯합니다. 논쟁거리가 되면 오히려 제 글을 홍보하는 효과만 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들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찾아내고 공개한 자료는 중국 공산당의 당안(檔案)이나 중국인 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에 근거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70여 년간 중공 정권이 자행한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의 사례가 세상에 공개돼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나 친중 세력은 쉽게 논쟁을 걸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썼지만,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 오늘날의 중국이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이고, 더 개방적이고, 더 헌정적인 새로운 국가로 진화해가기를…’”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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