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5. 버드나무 시인 박민수
춘천교대 재학 시절 윤용선과 동인지 발간
1968년 등사판에 놓고 롤러로 밀어만든 ‘二人’
월간문학 1975년 시인 등단 후 다시 공부
모교 총장 역임 후에도 현재까지 시심 가득
공직 생활 중에도 시집 10권 펴내는 천생 시인
여름의 끝이다. 매미 울음도 잦아든다. 그러나 8월의 장마는 끝나지 않았다. 해가 나는 듯싶다가도 금세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덮는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나와 아내는 오랜만에 박민수 시인 부부와 콩국수를 먹는다.
후룩 후룩, 뽀얀 국수는 이파리 후드기는 소리를 낸다. 어쩌면 버드나무 숲에 내리는 빗소리와 닮았는지도 모른다. 박민수 시인은 아주 천천히 국수를 먹는다. 나는 문득 박민수 시인의 ‘버드나무를 위한 노래’란 시 제목을 떠올린다. 아쉽게도 그 시의 내용은 잊었다. 다만 버드나무가 노래하는 이미지만 남았다. 젊은 문청이었을 때, 나는 박민수 시인의 시를 춘천교대 도서관에서 읽었다. 등사판에 롤러를 밀어서 찍어낸 그 얇은 시집은 도서관 열람대에 꽂혀 있었다. 이듬해 1969년에 나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윤용선 박민수와 만나기 시작했다. 2인 등사판 시집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박민수의 ‘버드나무를 위한 노래’가 나의 마음에 새록새록 시의 잎을 틔워주었다. 우린 즉시 ‘표현’ 동인이란 이름으로 뭉쳤다. 임동윤을 포함하여 ‘표현’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니까 표현 동인은 어언 50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동인 활동이 이렇게 장수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증편을 만들어 팔았다. 술떡이라 부르는 이 떡은 막걸리를 섞은 떡이다. 부드럽기가 카스텔라 이상이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는 독특한 떡이다. 어른들이나 아이들은 여름철에 이 시큼달달하고 스펀치 같은 떡을 즐겨 먹었다. 춘천에서 이 증편을 제일 잘 만드는 이가 소년의 어머니였다.
소년은 나중에 박민수란 이름의 시인이 되었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비록 하찮은 이야기라도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직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요. 그럼요. 하지만 이런 부분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마음을 연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마음엔 늘 시의 잎이 새록새록 눈을 틔운다.
소년 박민수는 춘천중과 춘천고를 졸업하고 춘천교대에 입학했다. 남춘천 집에서 소년은 공지천 내를 건너 춘천교육대학에 다녔다. 이제 그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늘 한 소년이 그의 마음속에서 시를 썼다.
그래서 소년의 절친인 윤용선과 의기투합하여 30여 쪽의 ‘二人’이란 얇은 책을 만들었다. 학생이 동인지를 펴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동인 시집은 소설 쓰는 절친 노화남의 공이 컸다. 그는 쇠판에 유지를 놓고 한 자 한 자 철필로 글씨를 긁었다. 이것을 등사판에 놓고 롤러로 밀었다. 활판인쇄가 아닌 수제로 만든 책이었다. 그때가 1968년인가, 그랬다.
그 ‘二人’ 등사판 시집이 나를 시인이 되게 했다. 버드나무를 위한 노래인데 실제로 버드나무가 노래를 한다고 했다.
그러엄. 버드나무 숲은 박새나 참새 등 작은 새들이 많이 사는 곳이야. 생각해 봐. 그 버드나무 숲에선 늘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구.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무가 노래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를 깨우치게 한 사람이 박민수 시인이었다.
박민수는 1975년 드디어 시인으로 등단한다. ‘월간문학’ 지에 당선작품이 게재된 그 날, 박민수는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원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때, 박민수는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원주에 소재한 야간대학에 입학했다. 낮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엔 대학생이 되었다. 당시 박민수가 졸업한 교육대학은 2년제였다. 그래서 4년제 야간대학 3학년에 편입하게 된 거였다.
박민수의 도전은 과감하고 굳건했다. 대학원을 서울대학원으로 정했다. 두 번째 응시한 시험에 합격하였다. 부부 교사였던 박민수와 명문희는 각각 사표를 내고 서울로 상경했다. 동아출판사에 입사하여 ‘동아대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대학원과 아이들 학비, 그리고 생활비를 대는 데는 박민수의 박봉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박민수의 아내 명문희 선생이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놓고 버스를 탔다. 두 시간이 걸렸다. 새로 부임한 학교는 그렇게 멀었다. 박민수는 공부가 좋았다고 했다. 아내의 고생을 생각했다.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하는 듯싶었다. 마침내 박민수는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문학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모교 춘천교대에 부임했다. 늦은 나이에 조교 생활을 마치고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7년 후, 박민수 교수는 교수들의 직선제 선출로 춘천교육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박민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박민수는 그로부터 할 일이 너무나 많아졌다.
1990년 총장을 맡으면서 창의성 중심의 교육을 강조했다. 재임 시 전국 교육대학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공정한 인사로 교수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비전 있는 학교 경영은 전국의 모범이 되었다. 박총장이 퇴임하고, 그 기운을 받은 탓일까. 이어서 내리 두 번을 춘천교대 출신 총장이 일을 맡아 연임했다.
그러나 박민수는 천성이 시인이었다. 그는 시를 살고, 시를 꿈꾸고, 시를 걸어왔다.
내겐 언제나 시가 버팀목이었어. 총장으로서의 경영 철학은 언제나 따뜻한 인간관계와 창의였다. 그 바탕엔 바로 끊임없이 분출되는 시심이 있었다. 시가 쓰고 싶어 미칠 때가 많아. 난 그러면 바로 써. 마치 샘물이 솟듯. 그 바쁜 공직생활 중에도 열 권의 시집이 상재된 것은, 버드나무처럼 자라는 시혼 덕분이었다.
어느 날 나는 기억을 지워버렸어.
생각이 안 나. 그래서 몇가지 기억만 챙겨서 그냥 살아.
철학가의 금언이나 산사 고승의 법문을 듣는 듯도 싶었다.
요즘 뭐해요?
걸어. 집 앞 둑방을. 그럼 좋아. 몸도 마음도.
봉의산이 환히 내다보이는 아파트 서재에 앉은 박민수 시인은 컴퓨터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다 낡은 성경책 한 권이 앞에 놓여 박민수의 손길을 기다린다.
뭐 쓰세요?
응, 뭐, 시와 성령에 대한 거, 그런 거.
박민수에겐 오직 기억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다 지워버렸어. 마치 시치미를 떼는 듯한 그의 말엔, ‘모든 기억은 내 안에서 다시 줄기를 뻗고 잎을 틔워’ 하는 듯했다. 버드나무 숲에서 새들이 노래하는 게 아니라, 버드나무 자신들이 노래를 부르는 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을 쓰고 나면, 아내와 함께 자신이 일구어놓은 밭으로 나가 잡초를 뽑거나 푸성귀를 뜯는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도 쉬지 않고 둑방을 걷는다. 무념의 시간이요 사색의 시간이다. 호수엔 두루미가 날고, 봉의산이 저만치 우뚝 서 있다. 박민수는 늘 시를 쓴다. 그래서 세상이 환하고, 고맙고,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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