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생활 속 무예 실천… 50대 중반에도 20대 체력”[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양종구 기자 2023. 9. 7.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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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규 박사가 무예 십팔기를 수련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십팔기를 수련한 그는 전공을 물리학에서 체육학으로 바꿔 무예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30년 넘게 수련한 그는 50대 중반에도 20대 버금가는 체력으로 한국 전통무예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최복규 박사 제공
물리학을 공부하다 체육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무술 영화배우’ 이소룡(리샤오룽)의 영향으로 무예에 관심을 가졌고, 전통무예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네덜란드에서 한국무예연구소와 네덜란드십팔기협회를 이끌고 있는 최복규 박사(54)는 십팔기 7단의 고수로 매일 수련하는 ‘무예인(武藝人)’이다.

“제 나이 또래 무예인들의 공통점은 이소룡의 세례(洗禮)를 받았다는 겁니다. 제가 네덜란드에 와서 무술 사범들을 만나 ‘왜 무예를 하게 됐느냐’고 물으면 거의 모두 이소룡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죠. 이소룡, 성룡(청룽), 이연걸(리롄제)로 이어지는 무협 영화의 주인공에게 매료돼 어릴 때부터 태권도와 유도, 쿵후를 익혔죠.”

양종구 기자
무협 영화의 주인공을 꿈꾸다 포기하는 대부분의 ‘이소룡 키즈’와 달리 최 박사는 실행에 옮겼다. 그는 서강대 물리학과에 들어간 뒤 서울 신촌로터리에 있던 한국무예원에서 해범(海帆) 김광석 선생의 문하생으로 본격적으로 십팔기(十八技)를 익히기 시작했다. 십팔기는 조선 영조 25년(1749년), 사도세자가 정리해 ‘무예신보(武藝新譜)’에 수록한 18가지 보병무예의 총칭이다. 현재 무예신보는 전해지지 않으나,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에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고인인 김광석 선생이 십팔기의 전통을 이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 박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련했다. 수련이 목적이었지만 몸도 탄탄해졌다. 최 박사는 1989년 서강대에 한국무예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십팔기 보급에 나섰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학생운동으로 늘 혼란스러웠던 대학가에서 ‘데모의 선봉대로 앞장서 달라’거나 ‘백골단에 맞설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총학생회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예는 단순히 창칼을 휘두르는 기술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무예가 신체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기는 하지만 그건 껍질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무예를 통해 구현되는 신체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아무리 높이 뛰어올라 발차기를 잘한다고 해도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예의 이면에 담긴 인문학적인 영역을 어떻게 하면 구체화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깊어지면서 졸업할 무렵 전공을 바꿨습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서 무예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영산대 동양무예학과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무예를 학문화하겠다는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한계가 많았다.

“2004년쯤 유럽에 나올 기회가 있었죠. 네덜란드와 스페인에서 무예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현지 무예인들을 만났어요. 무예가 유아 체육으로 전락한 한국 상황과 달리 유럽에서는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들도 동양의 무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죠. 다들 배우려는 열의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정보가 많았다. 그는 “무예의 이론과 실기를 모두 익힌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2007년 네덜란드로 떠났다. 곧바로 한국무예연구소를 설립해 레이던대 한국학센터와 함께 공동으로 한국 무예사 특강과 지도자 교육을 진행했다. 십팔기협회도 만들어 무예를 보급했다.

최 박사는 그동안 왜곡된 전통무예를 바로잡기 위해 책도 많이 썼다. 최근엔 ‘일본 검술의 한국화’란 책을 썼다. 그는 “일본 검술은 중국화한 장도, 김체건에 의해 도입된 왜검, 그리고 구한말 근대화된 일본 검술인 격검 등 크게 세 단계로 국내에 유입됐다”고 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 무술이 주류인 서구 사회에서 후발 주자로 출발한 한국 무예가 그간 이룬 성취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한국 무예의 성취를 포장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최 박사에게 무예는 삶의 일부분이다. 일상이 무예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생활 무예’라고 했다. 밥 먹듯 매일 2∼3시간 수련한다. 그는 “어떤 무술이든 배워서 수련하면 몸은 단련된다. 무술의 발차기, 주먹 지르기 등은 좋은 유산소 운동이자 근육 운동이다. 우리 몸은 움직이는 수련이 없으면 퇴화한다”고 강조했다. 30년 넘게 수련한 그는 아직 20대에 버금가는 체력을 과시하며 날렵한 손·발놀림으로 네덜란드 거구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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