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 오펜하이머[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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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만들어진 현실과 실제 현실의 이질적인 차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나 자신과 현실의 나 사이의 이질감은 거북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는 원자폭탄 개발을 치밀하게 주도한 천재적이고 정치적인 과학자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화장해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 두 물리학자는 무수한 현실의 세계에서 정치적·과학적 흔적을 남겼지만, 인간적인 흔적은 현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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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관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봤다.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다. 3시간 내내 터지는 폭탄과 같은 영상과 음향이 스크린에 흘러넘쳤다. 인류 사상 최초로 인류 전체를 파멸시켜 버릴 수 있는 수단을 만든 인간이자, 죄 없는 시민들을 생각하면 원자폭탄의 완성이 반드시 축하할 만한 과학적 성취는 아니라고 생각한 과학자의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과학이 지닌 ‘양면성’을 깊게 고민했던 과학자였다.
영화를 본 후, 만약 오펜하이머가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화 속 자신을 보고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바라볼 때처럼 보는 내내 심장이 굳어버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핵분열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미국 물리학자들이 다들 흥분하고 있을 때, 오펜하이머는 처음에는 핵분열 현상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다 실험물리학자의 실험을 보고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핵분열에서 중성자가 나온다면 원자폭탄이 가능하다고 계산한 천재적인 물리학자였다. 그는 핵분열이 발견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자신의 연구실 흑판에 지옥을 연상시키는 폭탄의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한 예언적 과학자이기도 했다.
영화는 원자폭탄 개발을 치밀하게 주도한 천재적이고 정치적인 과학자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지극히 그의 일부일 뿐이다. 프린스턴대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 위해 추천한 글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는 물리학자이자 뱃사람이며, 철학자, 마술가이자 언어학자, 요리사이며, 좋은 와인과 시의 애호가다.” 그는 어느 분야에선 취미의 영역을 뛰어넘는 예술적 재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흐의 그림 석 장과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그림이 한 장씩 걸려 있기도 했다.
1967년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한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생전에 뱃사람처럼 유유자적 배를 타고 항해하던 버진아일랜드 세인트존섬의 바닷가에 뿌려졌다. 원자폭탄을 지지했던 아인슈타인처럼. 화장해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 두 물리학자는 무수한 현실의 세계에서 정치적·과학적 흔적을 남겼지만, 인간적인 흔적은 현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삶이 한 편의 영화였던 것처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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