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교과서 실린 ‘납북어부=간첩’ 사건, 50여 년 만에 재심서 무죄
납북어부를 간첩으로 몰아 처벌하는 법리의 첫 피해자였던 80대 노인이 50여 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7일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박혜선)는 신평옥씨(84)의 반공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조기잡이 어선 동림호 선장이었던 신씨는 1971년 인천 연평도 인근 바다에서 조업 중 선원과 함께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뒤 이듬해 풀려났다. 하지만 곧장 경기 경찰국 공작반 소속 경찰관에게 영장 없이 구금돼 조사받다 약 한 달 뒤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다.
신씨는 1·2심에서 북한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국내 정보를 알려준 혐의(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강요된 행위라는 이유로 무죄 판단을 받았다. 하급심은 신씨가 북한 해역으로 넘어간 혐의 등 일부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 재판부(주심 한환진 대법원판사)는 “자의로 (북에) 들어간 이상 북괴 집단의 구성원과 회합이 있을 것이라는 미필적 예측이라도 하였다고 인정함이 타당하다”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는지 증명되지 않았고,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면 강요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새로운 법리를 제시하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심은 신씨에 대한 형량은 유지했지만, 기소된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신씨의 사건을 다룬 이 대법원판결은 ‘기대가능성과 강요된 행위’라는 법리로 불리며 납북어부를 처벌하는 데 활용됐고, 형법 교과서에도 소개됐다.
이후 평생 동안 강요된 죄인으로 살았던 신씨는 지난해 7월 자택을 찾아간 <경향신문> 취재진과의 만남을 계기로 재심 가능성을 처음 알게됐다. 같은 해 10월 재심을 청구했고, 올해 6월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지난달 31일 첫 재심 공판이 열렸는데, 검찰은 과거 수사가 강요된 상태로 이뤄졌다는 점을 인정하며 재심에선 무죄를 구형하거나 항소를 취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검찰은 약속을 지켰다. 검찰은 “피고인에 대한 증거는 불법 구금상태에서 조사가 이뤄져 증거 능력이 없고, 이를 기초로 한 법정 진술 역시 인정할 수 없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으니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또 “과거 50여 년 전 검찰이 이 사건과 관련해 적법절차 준수와 기본권 보장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현재 검사의 일원으로서 피고인에게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신씨의 변호인은 최후 변론에서 “평범한 국민인 피고인을 반공법으로 처벌한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고문과 가혹행위의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변론했다.
신씨는 “북한에 납북됐을 때나, 빨갱이로 손가락질받고 살아온 지난 세월에도, 법정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며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저 대신 고생한 저의 집사람의 손을 한 번 봐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이 억울함을 제대로 풀지 못했으면 마음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라며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홀가분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살펴달라”고 최후 진술했다.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신씨는 귀가 어두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 변호사가 귓속말로 무죄가 선고됐다는 사실을 전해주자 신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신씨는 전남 지역에 출신 납북어부 중 처음으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신씨 외에도 광주고법에는 동림호 납북어부 5명(3개 사건)의 재심 개시가 결정돼 추가 재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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