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고통 대물림...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베트남 철군 50주년]
질환 인정 범위 제한에 신청조차 못한 피해자들 수두룩
베트남에선 4세대까지 유전... 정부 차원 조사 없어 ‘절망’
우리 군은 59년 전 9월에 베트남으로 떠났고 50년 전 베트남을 떠났다. 8년 넘게 32만여명 파병됐지만 먼 이국의 총성 때문인지 우리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경제 성장과 함께 인구 1억명을 앞둔 베트남의 눈부신 변화도 전쟁의 악몽을 가리지만 아직도 그날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다. 전쟁의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온몸에 남아 여전히 그들을 괴롭힌다. 경기일보는 베트남 철군 5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와 베트남에 남은 아픔이 어떤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최재호씨(가명·48)는 베트남전 당시 파병용사로 참전했다가 고엽제 후유증에 걸린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말초신경병 환자다.
경기도의 한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최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지팡이를 짚으며 취재진을 맞이했다. 최씨의 집 일부는 흡사 약국 같았다. 식탁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로 각종 약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당뇨, 심혈관질환, 외과, 신경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여러 곳을 다녀서 먹어야 하는 약이라고 설명한 최씨는 고엽제 후유증 신청을 한 지 3년 만인 지난달 말에야 겨우 승인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중앙보훈병원에서 등급을 받았지만 보훈지청이 여러 번의 추가 검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설명이라도 해주면 이해하겠지만 명확한 사유 없이 이 검사, 저 검사를 요구해 힘들었다”며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공황장애까지 생겨 최근 정신과에서 처방한 약도 먹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범하게 살던 최씨의 인생은 20년 전부터 확 달라졌다. 멀쩡하던 그는 30대 당뇨가 생긴 후 손발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몸이 좋지 않아 이혼까지 하고 일용직 등 아르바이트로 혼자 생계를 해결해 왔다. 그나마 이달부터 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 등급을 받아 한 달 124만4천원과 진료비 90%를 지원받게 됐지만 여전히 일거리를 찾고 있다.
최씨는 “그나마 나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질병을 앓고 있어도 제한적 질병 인정 탓에 신청조차 못하는 2세들이 많다”고 했다.
7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국내 고엽제 후유증 판정 환자는 6만3천177명, 후유의증은 4만9천725명이다.
최씨와 같은 2세 피해자는 171명에 불과하다.
후유증과 후유의증을 신청했지만 등록기준에 미달된 고엽제 피해자는 각각 1만2천85명, 3만6천178명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질환이 후유증 범위에 해당되지 않아 신청하지 못한 환자를 감안하면 고엽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의 한복판이었던 베트남은 후유증이 벌써 4세대까지 유전되고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2세 환자만 우리보다 훨씬 많은 15만여명, 3세대 3만5천여명, 4세대 2천여명에 달한다. 고엽제의 고통과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고엽제 2세회의 부대표로 활동 중인 강형주씨는 “피해자 2세들의 모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들의 문의가 늘고 있다”며 “정부 조사가 미흡해 피해자들의 고통만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윤현서 기자 031@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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