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품고 70년’ DMZ… 예술가의 시선으로 담다

김신성 2023. 9. 7. 2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DMZ전시:체크포인트’
국내외 작가들 27명 참여 프로젝트 진행
1,2부 나눠 파주?연천 DMZ 일원서 열려
‘허용된 침입자’ 식물 흔적 그린 그라피티
정전협정 당시 자료?미군 기록 사진도
분단으로 생긴 장소에 다양한 작품 전시
가까이 있지만 잊었던 공간 의미 되새겨

‘커레히’는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족 언어로, ‘홀로 서다’ ‘홀로 버틴다’라는 뜻이다. 경기도 파주 미군기지 캠프그리브스에 주둔했던 미 2사단 506연대의 모토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보병의 낙하훈련을 담당했던 506연대는 조지아주 커레히산 근방에 자리 잡고 있다.

캠프그리브스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미군기지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각종 민간 교육장이나 전시장으로 활용되는 이곳 체육관에 총 33장의 군용 모포가 높은 천장으로부터 마치 낙하산처럼 내걸렸다. 군용 모포는 혹독한 훈련과 참혹한 전장 속에서도 잠시나마 의지할 수 있는 안전과 평화의 소품이다. 작품에 사용된 모포의 앞면에는 장병의 이름과 물감이 배어 나온 흔적들이 있고, 이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모포들은 피아 구분이 불가능한 경계를 보인다. 군대는 몸과 생각 등이 훈육되는 장소이지만 잠은 아무런 예고나 목적 없이 엄습한다. 작가 임민욱은 설치작품 ‘커레히-홀로서서’(2023)로 통제된 비무장지대(DMZ)를, 통제를 벗어난 구역으로 묘사했다. 잠은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임민욱 ‘커레히-홀로서서’
작가 이우성은 2021년 여름 경기도 김포에 자리한 야산 애기봉을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154고지’라고 불리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던 애기봉은 북한 선전마을과 불과 1.5㎞ 거리다. 애기봉 바로 앞은 한강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모여 서해로 흐르는 마지막 구간인 조강이다. 작가는 조강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북녘땅을 바라보며 개인으로서 흡수했던 북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북한 땅 어딘가에 있을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이야기, 특히 정치와 이념의 싸움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겪어야 했을 누군가를 상상했다. 작품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작가가 북한에 있을 그에게 건네는 인사말이다. 답사 당시 흐린 날씨 때문에 망원경 렌즈를 통해 겨우 보아야 했던 저 너머의 풍경은 밝은 분홍빛 천에 더욱 선명하게 표현됐다. 작가는 4m 너비의 천 위에 그가 보고 상상한 것을 충실히 풀어냈다.
이우성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27명의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DMZ 전시: 체크포인트’가 경기도 DMZ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의 분단 상황과 DMZ 접경지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1, 2부로 나뉘어 파주와 연천에서 진행된다.

파주는 북한의 개성공단이 내려다보이는 도라전망대와 미군이 남기고 떠난 군 시설이자 근대문화유산인 캠프그리브스, 수천만개의 바람개비가 맞이하는 평화누리에서 23일까지 전시한다.

연천은 10월6일부터 11월5일까지 민통선 내부 안보전시관을 탈바꿈시킨 연강갤러리와 북한 원산까지 이어지는 경원선 가운데 신망리역 대광리역 신탄리역 세 곳을 엮은 ‘경원선 미술관’을 활용할 예정이다.

도라전망대 전시는 식물로 가득 찬 DMZ의 실제 풍경을 다루거나 이 같은 풍경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질문한다. 입구에 놓인 정소영의 조각 ‘환상통’은 사라진 신체 부위에서 느끼는 환상통처럼 일상에서 사라진 부분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소영 ‘환상통’
DMZ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숨겨진 공간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동시에 완화되는 완충지대이기도 하다. 일종의 틈과 같은 공간에서 식물은 허용된 침입자다. 덩굴들의 흔적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이끼바위쿠르르의 그라피티 ‘덩굴-경계와 흔적’은 식물이 잠식한 공간에 대한 기록이자 사라진 인간에 대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다.

옥승철의 ‘녹색광선’과 ‘구름’은 레이저 사격이나 폭발의 한 장면을 멈춰 놓은 듯한 이미지다. 적과 아군,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이미지를 편집함으로써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과 일시 정지된 우리의 역사가 겹쳐 보이도록 한다.

2004, 2006, 2015년에 파주와 철원의 DMZ 모습을 담은 요네다 도모코의 사진 작품과 군 복무 경험을 텐트 이미지로 표현한 이재석의 회화 또한 ‘이곳이 DMZ구나’라는 감정이입을 돕는다.
이끼바위쿠르르 ‘덩굴-경계와 흔적’
캠프그리브스는 정전협정 당시 미군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소다. 군인 막사들에 전시되어 있던 기존의 기록과 자료 사진 사이에 작가들의 작업이 끼어들어 가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장병들의 막사였던 도큐멘타1에서는 정전협정 관련 자료와 미군들의 일상 사진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도큐멘타2에서는 혜안폴권카잔더의 설치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도큐멘타3에는 동두천 미군 클럽의 현재 모습을 다룬 최원준의 ‘미군 기지촌 클럽에 대한 작은 역사’ 연작이 선을 보인다. 킴 웨스트팔의 레코드 작업 ‘스파이시 메모리’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DMZ 안 민간인 마을인 ‘자유의 마을’을 다룬 문경원, 전준호의 비디오 작품도 함께 소개된다. 도큐멘타4에 가면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나미라의 비디오 설치작업 ‘밤시각’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전시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역임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총괄기획했다.

‘DMZ 전시: 체크포인트’는 남북분단으로 생겨난 여러 장소를 연결해 관람객들이 곳곳을 돌아보면서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짜여진 구조다. 마치 게임에서 다양한 장소를 방문해 특별한 아이템을 얻는 것처럼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70년 세월을 되새겨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 가까이 존재하지만 잊고 있는 공간 DMZ, 비무장지대지만 가장 무장화된 역설적인 공간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DMZ를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김선정 감독은 “예술가의 시선이 무거운 역사와 정치에 비해 어쩌면 감상적이고 가벼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가벼움 안에 여러 층위의 생각들과 상상력들이 담겨 있어서 어느 곳으로든 날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싹 틔울 씨앗처럼 퍼져 나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는 서울 출발 전시해설 버스투어, 임진각 출발 파주 전시장을 경유하는 DMZ 평화관광 전시해설 버스투어 등이 있다. 작가와의 대화, 장수미 안무팀의 퍼포먼스, 관객참여 페인팅 등의 부대행사도 열린다. 신분증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공식누리집(https://dmzopen.kr/)을 참조하면 된다.

파주=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