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과 똑같은 ‘빨간 칠’ 광풍…영웅은 이렇게 두 번 죽는다[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기자 2023. 9. 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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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오펜하이머와 홍범도
오펜하이머 ‘좌익 전력’ 공격했던 미 정부는 지난해 ‘부당’ 인정
한물갔던 매카시즘, 홍범도 장군 마녀사냥으로 화려하게 부활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화제작 <오펜하이머>를 나는 개봉 첫날에 봤다. 얼마 전 광복절 저녁, 동네 조그만 영화관에서였다. 화면으로 구현된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마주하는 감회는 새로웠다. 전쟁이 끝난 뒤 오펜하이머는 1945년 11월 로스앨러모스에서 행한 연설에서 “우리가 이 일을 한 이유는 과학자의 기질적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과학자라면 이런 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라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좋은 일임을 믿을 것입니다”(제레미 번스타인,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라고 말했다. 나 같은 물리학자들이 오펜하이머를 향해 뭐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하고도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과학자의 기질적 요구’가 무엇인지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야 당연하게도 아인슈타인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임에 분명하다.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20세기 인류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세기 인간사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나는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과 이후의 인간세계가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자력이라고 하는 전례 없는 에너지원을 인간이 손에 넣게 되었다. 원자력 또는 핵에너지는 무거운 원자의 원자핵이 보다 가벼운 원자핵들로 쪼개지거나, 가벼운 원자핵들이 모여 더 무거운 원자핵을 형성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이다. 그 양은 보통의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보다 최소 수천만 배나 더 크다. 그렇게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분출시키는 장치가 핵무기이다. 핵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직접 확인했듯이 폭탄 하나가 도시 하나를 절멸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이다. 이 또한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무기이다. 그 때문에 전쟁의 개념과 전략 또한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핵무기는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질서의 기본골격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전기 제목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 것은 참 적절한 작명인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이른바 빅 사이언스(Big science)의 전형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말 속에는 과학이 인류 전체를 일시에 몰살시킬 수도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유명한 대사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들에게도, 그것을 사용하는 군인이나 정치인들에게도 현실에서 실제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되었다. 확실히 핵무기는 천재들의 악마적 재능이 만든 걸작임에 분명하다.

핵무기의 그런 파멸적 특성 때문에 실제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중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가까운 사이였던 이지도어 라비는 3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정점이 대량살상무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핵폭발이 지구의 대기를 모두 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아서 콤프턴은 차라리 나치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런 파멸적인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핵무기 개발의 연구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 자신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가 실전 투하된 이후 다소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책임자로서 오펜하이머는 1945년 핵무기를 이용한 ‘공격목표’ 선정위원회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 중에는 일본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전에 공개 시연하자는 의견들도 있었다. 콤프턴과 오펜하이머는 그보다 직접 일본에 투하하는 것에 찬성했다. 오펜하이머의 경우 핵무기의 실전 사용으로 앞으로의 ‘모든 전쟁’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아마도 조선의 과학자가 그때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실전 투하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우라늄탄이나 플루토늄탄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의 제조에 반대했고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인 통제를 설파하고 다녔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소련에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정부 차원에서 핵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영국과 함께 미국이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을 같이했던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백악관이나 군인들은 대체로 오펜하이머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만이 더 강력한 핵무기를 더 많이, 독점적으로 가지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공산국가 소련을 압도하며 전후 세계질서를 미국이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전쟁이 끝나고 국가적인 영웅으로 떠오른 핵무기의 아버지가 이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분명 워싱턴에서는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1947년부터 미국 원자력에너지위원회의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물리학과 언어(오펜하이머는 6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폭탄을 만드는 데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오펜하이머였지만 자신의 신념을 정치인들에게 전파하고 설득하는 데에는 그리 유능하지 못했다. 오펜하이머의 적들에게는 그의 과거 좌익 활동 경력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부인과 동생 내외는 한때 공산당원이기도 했고, 주변 인물들 중에도 공산계열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연구원 중에는 소련의 첩자도 있었다. 마침 194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는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가 FBI를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원자력에너지위원회가 오펜하이머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954년 보안청문회가 열렸다. 최종적으로는 오펜하이머의 기밀취급인가가 취소되었다.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를 소련의 첩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기 어려운 요소를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등장하는 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우리의 경험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이 좋은 대비가 될 것 같다. 일명 ‘통닭구이’나 물고문 같은 가혹행위는 기본이고 증인과 증거조작도 밥 먹듯이 해서 결국은 감옥에 보내고 가족들은 평생을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게 우리네 역사였다. 그에 비하면 오펜하이머는 ‘고작’, 청문회에 불려나가 싫은 소리 듣는 정도의 고초를 겪고는 기밀취급인가가 취소되는 것으로 끝났다. 가혹한 고문도, 감옥살이도 없었다. <오펜하이머>의 시대는 <변호인>의 시대보다 대략 30년 전이다. 한국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시시하고 지루해 보이는 청문회 장면에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게 뭐야?”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는…정부·여당·육사의 이해 어려운 태도
시대 거슬러 ‘멸공의 횃불’이나 드는 우리 현실, 그저 참담할 뿐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던 레드 콤플렉스는 21세기 한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최근에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사실이 논란에 올랐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홍범도 장군의 이 경력을 문제 삼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교내에 설치된 장군의 흉상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2023년 현재진행형인 홍범도 장군의 ‘부관참시’는 70년 전 미국에서 오펜하이머를 상대로 진행했던 마녀사냥과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영웅이지만 소련 공산당과 가깝다는 이유로 국가의 적으로 몰리고 있다.

나는 역사전문가가 아니어서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자유시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기준의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자의 기질적 요구’로 파악해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공산당에 가입한 것 자체가 문제라면, 북한의 고위 간부로서 영화를 누렸던 태영호 현 국회의원부터 국회에서 제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전향해서 대한민국에 준 이득이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공보다 더 크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째, 만약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사건에 연루돼 있고 그래서 독립군에 피해를 입힌 것이 정말 사실이고 그 죄를 물어 흉상을 옮기려 한다면, 일본의 간도특설대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열심이었던 백선엽의 묘 또한 국립묘지 밖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셋째, 육사와 그 동창회가 보인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다. 홍범도 장군의 일생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왜 흉상이 처음 세워질 때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행동에 나서지 않았을까? 역사인식과 군의 정체성에 대한 엘리트 군인의 지조라는 것이 대통령에 따라 눈치를 볼 정도로 가벼운 것인가, 아니면 홍범도 장군의 이력이 실제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일까? 나는 후자가 사실이길 바란다. 만약 전자가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 엘리트 군인들에게 국가안보를 맡겨왔고 또 앞으로 맡겨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군인정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사회성 없고 바람기 많았던 한 천재물리학자도 자신의 지조와 신념을 그리 가벼이 버리지는 않았다.

2022년 미 에너지부에서는 1954년 청문회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오펜하이머의 기밀취급인가 취소를 철회했다. 사건발생일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뒤였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다시 육사로 돌아가는 데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미국에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그 이야기로 세계적으로 흥행한 대작영화를 만드는 시대에, 우리는 거꾸로 ‘멸공의 횃불’ 시절로 돌아가 빨갱이 사냥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참담할 뿐이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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