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오펜하이머, 햇빛에 관한 명상
빛은 빛나기 이전에 비어 있다. 텅 빈 공간이기에 만나는 것 모두를 품을 수 있다. 꽃을 꽃으로, 당신을 당신으로, 대담한 산을 웅장한 높이로 세상 속에 세워놓는 햇빛. 고개 숙인 할미꽃에는 고개 숙인 할미꽃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거기에는 딱 그만큼 그곳의 햇빛이 있다.
빛은 물리학의 오래된 재료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일으켜 세운 뒤 사라지는 이 빛들을 물리학자들은 얼마만큼 사랑할까. 서울 상계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시절. 햇빛이 아주 쨍한 날이면 아내는 그 눈부신 햇살을 굉장히 아까워했다. 베란다에 와글와글 뛰노는 햇빛을 보면 빨래라도 말려야지 않겠느냐며, 귀한 보물이 그냥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라도 하는 듯 손을 비볐다. 아내가 일견 그런 기특한 생각으로 자신의 서툰 살림솜씨를 가리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야박한 바가지일까.
어쨌든 햇빛은 우리가 짐짓 낭비하는 사이 녹색식물들과 결합하여 세상의 식량을 만드는 공장을 가동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몽매한 젊은 부부만 그때 그 광합성을 몰랐을 뿐이었다. 햇빛,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햇빛. 나무들이 신나게 걸치는 외투. 나의 생각이 말에 담기듯 세상을 담는 저 햇빛들. 길이도, 넓이도, 부피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치까지도 초월한 뒤 마침내 주어가 생략된 이 세계를 장악하는 햇빛.
하지만 그저 대단한 햇살이라고 감탄하는 사이 햇빛은 또한 저의 은밀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거울을 보라. 햇빛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시시각각 한 겹씩 떼내어 저 광활한 우주의 한구석으로 옮기고 있는 것을. 그러니 안 변하는 척, 엄청 변하고 있는 눈앞에 속지 말 것.
그제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장면도 빛들의 조합이지만 화면 속의 줄거리도 결국 빛을 잘못 건드린 이야기였다. 물의 폭포, 불의 폭발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빛의 폭탄에 현기증이 났다. 상계동에서부터 여러 우회로를 거쳐 지금 이 극장까지 오는 동안 나의 눈에는 너무 많은 먼지가 쌓였다. 무시로 찾아오는 피곤은 다 여기로부터 유래하는 것. 이제 나도 빛의 만만한 포로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영화 어때? 하려다가 빛은 어때?로 말을 바꾸었다. 햇빛에 대해 일정 지분을 갖는 아내는 아직 엔딩크레딧에 취해 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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