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책 향기도, 시위학생도 품던 종로서적
1980년대 서울의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면 그 서점의 포장지로 책 표지를 싸주었다.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도 포장한 책을 들고 다니면 그 자체로 폼이 났다. ‘나 종로서적, 교보문고 다녀왔다’는 표시였다. 지적 허영이었지만, 그 시절 내겐 하나의 문화패션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종로서적 포장지와 교보문고 포장지는 대조적이었다. 종로서적 포장지엔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과 보신각이 짙은 갈색의 묵직한 톤으로 디자인돼 있었다. 투박하지만 무언가 고집 같은 것이 묻어났다. 반면, 교보문고 포장지는 교보문고 글자를 변형한 로고를 나열하듯 뽀얀 종이에 디자인한 것이었다. 종로서적에 비하면 서구적이고 현대적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 차이는 건물에서도 나타났다. 1948년 문을 연 종로서적은 종로2가의 오래된 건물을 증축하고 연결하면서 공간을 확장했다. 그래서 좁은 입구를 통해 계단을 타고 6층까지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와 달리 1981년 6월 문을 연 교보문고는 새로 지은 고층빌딩의 지하 한 개 층을 매장으로 사용해 널찍하고 시원했다.
1970년대 대형서점으로 독보적 지위를 누리던 종로서적은 1980년대 들어 교보문고와 치열한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조금씩 그 위상이 낮아지면서 2002년 6월 부도를 맞고 말았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와 붉은악마의 함성이 서울을 뒤덮을 때였다. 요즘 서울 종로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특별전 ‘우리가 만나던 그곳, 종로서적’이 열리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로서적의 흔적을 돌아보는 전시다. 다양한 관련 사진, 사람들이 종로서적에서 구입한 책들, 종로서적에서 발간한 서적과 출판소식지, 책 포장지와 봉투, 직원들의 이야기,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했던 소설가의 소회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서점과 독서공간이라는 측면 외에 약속장소로서의 의미도 부각했다. 종로서적은 1980~1990년대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계단을 나서면 바로 종로서적 건물이었다. 평일 오후가 되면 만남을 약속한 사람들이 몰렸고 원래도 좁은 1층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약속 메모지를 붙여놓는 공간도 생겼다. 종로서적 직원에게 메모지 전달을 부탁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이런 인간적인 분주함이 종로서적의 매력이었다.
전시장에는 1980년대 판금서적 목록도 등장한다. 이른바 ‘관계당국’이 작성해 하달한 목록도 있고, 그것을 토대로 서점에서 정리한 목록도 있다. 1984년 8월에 작성한 어느 목록은 “하기 도서는 관계당국에서 판매 부적합 도서로 단속 중인 도서이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로 시작한다. <세계경제입문>(거름), <마르크스냐 샤르트르냐>(인간사), <시민혁명의 역사구조>(청하), <게오르그 루카치>(이삭), <변증법이란 무엇인가>(중원문화사) 등이 목록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판금도서를 감춰놓고 몰래 파는 서점도 적지 않았다. 종로서적도 그랬다.
1980년대 종로서적 앞 종로2가는 기습 시위가 자주 열리는 곳이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시위대는 종로서적과 맞은편 서울YMCA 뒤쪽 골목으로 흩어져 이런저런 가게로 숨어들었다. 종로서적도 잠시 몸을 숨기는 곳이었다. 종로서적 직원들은 잽싸게 시위대를 받아들이고 태연하게 셔터를 내리곤 했다.
서점이었고 문화공간이었고 친구나 연인을 만나는 약속 장소였던 곳, 때론 시위대의 피난처가 됐던 곳, 종로서적은 이런 곳이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의 열기에 밀려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니. 당시 종로서적의 부도를 두고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탓”이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그 이유를 떠나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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