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88) 인천 어시장

기자 2023. 9. 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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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이 바뀌어도 사람살이는 여전, 오염수에 그들도 지구도 걱정이다
인천어시장 1971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인천어시장 2021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인천 연안부두에 가면 인천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인천종합어시장’이 있다. 이 시장의 연원을 찾아가면 1902년 대한제국 시절에 닿는다. 인천어시장은 1902년 중구 신포동에서 시작됐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재판·치안·과세 등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거류 지역인 ‘조계(租界)’가 설치되자 인구가 크게 늘었고, 당연히 그 인구를 위한 시장이 배후지에 등장했다.

‘신포(新浦)’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포구’라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 때의 이름 ‘신정(新町)’이 해방 이후 바뀐 것이라 한다. 지금 신포동에는 신포국제시장이 있는데 어시장과 함께 생겼던 채소시장이 면면히 내려온 것으로, 유명한 만두 프랜차이즈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인들의 급증이 어시장을 성행하게 한 이유였다.

어시장은 1931년 월미도가 있는 북성동으로 옮겼다가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즉 1971년 사진과 2021년의 사진은 다른 장소의 것이다.

북성동 어시장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에는 300개가 넘는 점포가 성행했다고 한다. 북성포구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선상(船上) 파시(波市)’가 열리던 곳으로, 밀물이 되면 입항한 어선 위에서 직접 거래가 이루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손님이 끊긴 2021년 사진은 활력을 잃은 모습이다.

바뀐 것은 시장 위치만이 아니다. 50년 전의 사진은 대야에 놓인 선어를 팔고 있지만 최근의 사진은 이곳저곳에 활어수족관이 놓여 있다. 옛날 생선은 구이나 찌개용으로 먹던 선어가 중심이었겠지만 이제는 횟감을 정점으로 다양한 어패류가 판매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패류의 생산 방식도 크게 변했다. 어부들(fishermen)이 잡아오는 것보다 양식업 종사자(aquaculture workers)가 생산한 것이 더 많아진 것이다.

시장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 근면한 사람들에게 우환이 생겼다. 일본 도쿄전력 원전 오염수 방류로 수산물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오염수를 투기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 ‘괴담’인 것과 똑같이, 오염수 투기로 한반도 근해의 수산물을 먹을 수 없게 된다는 말도 ‘괴담’이다.

하지만 핵실험, 핵사고, 핵폐기물 방류 등으로 꾸준히 방사능이 누적돼 온 바다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핵발전소 사고 오염수를 합법적으로 투기하는 길이 열린 지구의 미래가 위태롭기 짝이 없다.

김찬휘 녹색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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