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연인’이 병자호란의 역사를 그리는 방식

기자 2023. 9. 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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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인조 14년) 겨울, 평화로운 마을 능군리에 첫눈이 내린다. 마을 최고령 부부의 회혼례가 열리는 날이었다. 풍악 소리의 흥겨움이 절정에 이를 무렵,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혼인 잔치가 중단되고 만다. “오랑캐가 쳐들어왔소! 오랑캐가 임금을 가두었소!” 과거 전란의 비극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백발노인은 연신 고함을 지르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오랑캐가 쳐들어왔으니 나라가 망했구나. 사직이 무너지겠구나. 문을 닫아라. 여인들은 낯을 감추고 사내들은 쇠를 들어라!”

김선영 TV평론가

MBC 사극 <연인>(사진)이 병자호란의 시작을 묘사한 장면에는, 이 작품의 중요한 역사관이 압축돼 있다. 우선 역사를 평범한 사람들의 시점으로 기술하는 황진영 작가 특유의 관점이 이번 작품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 작가는 이육사 시인의 생애를 그린 <절정>(MBC),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을 담아낸 <제왕의 딸 수백향>(MBC), 연산군 시대의 민초 혁명을 다룬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MBC) 등 전작들을 통해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선보여왔다.

<연인>도 마찬가지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이 남한산성에서의 논쟁에 초점을 맞출 때, <연인>은 전쟁에 휘말린 백성들의 삶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이때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다뤄진 여인들의 전쟁도 좀 더 비중있게 그려진다. “여인들은 낯을 감추고, 사내들은 쇠를 들어라”라는 광인의 외침에도 나타나듯, 이 시기의 전쟁은 성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었다. 창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서는 남성들과 강간·납치의 위협에 맞서야 했던 여성들, 즉 충절의 전쟁과 정절의 전쟁이다.

경쾌한 로맨스 문법을 전진 배치한 드라마 초반부터, 이 두 개의 전쟁은 꾸준히 암시돼왔다. 전쟁 중 여인들이 목숨을 바쳐 정절을 지킨 사례를 배우는 능군리 규수들의 모습과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상소를 올리자고 목소리를 내는 선비들의 모습을 대비시킨 첫 화의 연출이 대표적이다. 드라마가 그리는 병자호란의 비극에서는 예의 ‘삼전도의 굴욕’과 기개만으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의병들, 절개를 지키고자 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여인들의 참혹함이 같은 무게로 놓인다.

<연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두 전쟁을 다른 관점으로 극복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병자호란을 새롭게 기술한다는 데 있다. <연인>의 두 주인공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는 충절과 정절의 지배적 이념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다. ‘임금을 구하고 충심을 보이자’는 성균관 선비의 말에 이장현이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는데 왜 백성이 임금을 구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이나, 피란길에 친구를 겁탈하려는 몽골군을 죽인 유길채가 절개의 교훈을 떠올리는 친구에게 생의 의지를 환기시켜주는 장면은 그들 캐릭터의 전복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장현과 유길채의 전복성은 병자호란을 새로운 각도로 들여다보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연결된다. 가령 9화에서 이장현은 소현세자(김무준)에게 “조선의 임금과 조정이 무능하고 나약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은 전쟁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는 말”이라고 충언한다. 그는 패배한 조정이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떳떳하게 죽거나 비굴하게 사는” 양극단의 길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담대하게 살아내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이장현의 ‘다른 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유길채다. 전쟁으로 가장이 된 길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 양갓집 규수가 천한 일을 한다는 멸시에도 불구하고 길채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식구들을 위해 꿋꿋하게 운명을 개척한다.

<연인>은 이처럼 이장현과 유길채의 강렬한 생존의지를 통해 패배와 굴욕의 역사로 기록되던 병자호란 이면에 백성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유길채의 활약은 매우 인상적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환국한 뒤에도 가문을 수치스럽게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라져간 수많은 여성의 비극 위에 새겨진 강인한 들꽃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인>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뜨겁게 이어져 온 백성들의 생존 역사를 환기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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