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건축의 시대, 구마 겐고의 세계

이선아 2023. 9. 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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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나무·돌·종이를 사랑한 건축가

‘약한 건축.’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익숙한 단어다. 그런데 건축이 약하고 강하다니, 언뜻 들으면 이상한 말이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지금껏 건축이 자연을 이기고 파괴하는 ‘강한 건축’이었다면, 이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약한 건축’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개념을 만든 건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69)다. 일본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현대 건축의 거장’이다. 2021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구마의 건축은 자연을 감히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장소에서 나는 나무, 돌, 종이를 사랑한다. 못 하나 없이 나무 조각을 겹쳐 올려 10m 높이의 건물을 완성하는가 하면, 벽을 허물어 바람이 통하도록 해 자연과 건축을 하나 되게 한다. 그야말로 ‘자연에 지는, 약한 건축’이다.

약하다고 해서 결코 보잘것없지 않다. 도쿄올림픽경기장과 네즈미술관, 베이징 그레이트 뱀부 월, 스코틀랜드 던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 등 각 도시의 ‘랜드마크’가 그의 손을 거쳤다. 수천 개의 나무 루버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조화롭게 녹아드는 것을 보노라면 경외감이 밀려온다.

구마는 스스로를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건축은 단순히 건물 모양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통로다. 기후 변화와 환경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구마의 건축이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그의 건축물은 제주(아트빌라)와 춘천(NHN데이터센터) 등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아르떼는 최근 서울을 찾은 구마를 만났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용산구 화이트스톤 갤러리를 함께 둘러본 뒤 건축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사람들 틈에서 70년 평생 ‘자연에 지는 법’을 꾸준히 외쳐온 거장의 말을 웨이브를 통해 공유한다. 이것은 그의 등 뒤로 우뚝 솟아 있는 남산, 그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의 이야기다.

'약한 건축'의 거장 구마 겐고를 만나다
"나무·돌·종이와 끝없이 대화…내 건축은 자연에 지는 것"

최혁 기자

지난 2일 오후 4시 서울 용산구 남산도서관 인근. ‘황금시간대’인 토요일 오후, 한국·일본·대만 등 국내외 미술계 인사 200여 명이 이곳에 일제히 모여들었다. 일본 갤러리 중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화이트스톤의 오프닝 행사 때문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건축 거장’ 구마 겐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 대표 건축가인 구마는 이번에 새롭게 개관한 화이트스톤 서울점의 리노베이션을 맡았다. 과거 외관은 변화를 최소화하고, 내부를 갤러리 공간으로 새롭게 바꿨다. 이날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구마는 지하 1층부터 옥상 루프톱까지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VIP 라운지에 다다른 그에게 “만족스럽냐”고 묻자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유창한 영어로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화이트스톤 서울점의 리노베이션을 맡으셨습니다. 이곳의 콘셉트는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공간의 입체적인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마다 공간 높이를 다르게 디자인했기 때문이죠. 갤러리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공간의 변화를 다이내믹하게 즐기면서도 연속성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선생님의 ‘시그니처’는 나무·돌 등 자연적 소재인데, 화이트스톤엔 콘크리트가 있습니다.

“이번엔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방식이라 그 장소의 소재를 새롭게 사용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기둥이나 보도 그대로 놔둬야 했죠. 그래서 기존 건축물과 주변의 기억을 계승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장소의 기억을 이어가는 것은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특히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럼 이것도 ‘약한 건축’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약한 건축은 단순히 자연적 소재만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핵심은 ‘존중’입니다. 주변을 존중하고, 기존에 있던 것들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죠.”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떻습니까.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굉장히 활력이 느껴지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에너지가 활기차게 살아 있는 느낌입니다. 건축계에서도 가까운 미래에 한국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특별히 좋아하는 건축물이 있을까요.

“저는 옛날 집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 민속촌을 한 번 가봤는데 집에 종이를 사용한 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일본 전통 건축물에도 종이를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약하고 잘 찢어지는데, 한지는 매우 빳빳하고 강했습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무대에서 주목받는 건축가입니다. 무엇이 ‘지금의 구마 겐고’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전부터 자연, 환경, 건축의 공존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꾸준히 환경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해왔던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술가도 계속 변화합니다. 과거의 구마와 지금의 구마는 어떻게 다른가요?

“코로나19 전후로 제 작업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라이프스타일과 사회 구조를 급속도로 바꿨기 때문이죠. 이번 화이트스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대다수의 갤러리는 평평하고 단조로운데, 이곳은 좀 더 역동적으로 보일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영감을 유지하기 위한 당신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되도록 차를 타는 대신 걸으려고 합니다. 걸으면서 자연의 재료들과 대화하고, 재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과정에 빠져들어서 2시간 넘게 걷기도 합니다.”

▷최근 당신에게 울림을 준 예술가가 있나요.

“3월에 돌아가신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예전부터 오랜 친구였습니다. 그가 남긴 산림보전단체 ‘모어트리즈(more-trees)’를 제가 이어받게 돼서 최근 그를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젊은 세대에게 심플한 메시지를 남기고 싶습니다. ‘삶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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