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대작 올인’ 대기업 투자가 한국영화 위기 불러”
“코로나 이후 오티티가 확산되고 극장요금도 오르면서 관객의 발길이 끊겼다고 하는데 한국영화의 더 큰 위기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기업 투자자의 매뉴얼로 영화를 만들면서 새로움을 주지 못하니까 관객이 외면하는 거죠.”
경찰, 사법부, 모피아 등 국가 권력을 정조준하며 금기에 도전해온 영화감독 정지영(76)의 연출 데뷔 40주년을 맞아 회고전이 열린다.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14일까지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 1985’(2012), ‘블랙 머니’(2019) 등이 상영되고 다음달에는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올가을 새 영화 ‘소년들’ 개봉을 앞둔 41년차 정 감독을 6일 오전 아트나인에서 만났다.
“극장에 사람이 안 온다고 해도 ‘범죄도시3’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도 성공했잖아요. 한국영화의 침체 원인을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만 찾아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대기업 투자자들이 작은 영화와 중간급, 대작 영화에 골고루 투자를 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나올 때 거기서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붐이 일어나는 건데 대작 한두 개로 관객몰이를 하려다 보니 지금의 위기에 당도한 것이지요.”
늘 자신을 “아티스트가 아닌 대중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하는 정 감독이 내린 요즘 한국영화 위기에 대한 진단이다. ‘남영동 1985’를 제외하고는 투자자들이 꺼리는 소재의 작품들로 흥행에도 성공해온 정 감독은 “대중이 싫어하는 소재를 선택하면서도 어떻게 대중과 소통할까를 늘 고민해왔다”며 “론스타 사건을 다룬 ‘블랙 머니’를 만들 때 이해하기 까다로운 금융 스캔들을 대중적인 영화 언어로 풀기 위해 특히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정 감독은 프랑스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4학년 때 감독협회의 영화인 지망생 모집에 지원해 충무로 이력을 시작했다. 당시 현장에 투입되자 다른 동기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는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과 정 감독 둘만 남았다. 그는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로 일하다 1982년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지만 ‘사회파 감독’으로 자리잡게 된 건 ‘남부군’부터다.
“제 작품 세계가 ‘남부군’부터 변했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어요. 내가 변한 게 아니고 사회가 변했죠. 1980년대에는 사회 문제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검열에 걸렸거든요. 87년 6월 항쟁이 저에게는 하고 싶은 영화를 하라는 허락처럼 여겨졌어요. 이제는 작품이 탄압을 받아도 싸워볼 수 있겠다, 내 싸움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이런 믿음이 생긴 거죠.”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14일까지
‘부러진 화살’ ‘블랙 머니’ 등 상영
‘남부군’으로 사회파 감독 자리 잡아
“6월항쟁으로 하고 싶은 영화 만들어”
‘검경 조준’ 신작 ‘소년들’ 개봉 앞둬
“리더급 감독들 ‘영화 현안’ 발언해야”
이후 정 감독은 작품뿐 아니라 스크린쿼터, 대기업 독과점 문제 등 한국 영화계의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해왔다. 최근에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내홍에 대해서 이사회 사퇴와 혁신위에 전권 이양 등을 주장했다. 그는 최근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나 경찰의 관객수 조작 혐의 수사 등의 현안에 대해 영화인들이 이전과 달리 발언하지 않는 데 대해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달라졌다”면서도 아쉬워 했다. “소위 유명한 감독들, 성공한 40~50대 리더급 감독들이 나서줘야 하는데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영화인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긴 안목으로 소통하고 함께 대처해야 하는데 그게 없어지는 게 좀 답답하죠.”
가을 개봉을 앞둔 ‘소년들’은 2016년 재심으로 무죄판결이 난 1999년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을 다루며 다시 경찰과 검찰 권력을 정조준한다. 제주 4·3 사건과 김구 암살 사건 등 해방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3편도 준비 중이다. 1980년대부터 함께 영화를 만들던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 가운데 현역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외롭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노하우가 버려지는 게 아깝다”고 했다. “그 감독들이 은퇴를 한 게 아녜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신작을 준비하는데 투자자를 만나기가 어려운 거죠. 시대에 따라 영화 트렌드가 바뀌듯이 감독의 작품세계도 바뀌어가요. 그런데 그냥 늙었다, 올드하다는 선입견으로 그들의 기획안이 검토나 논의 한 번 제대로 안 되는 거죠.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하고 있을 뿐입니다.”
6일 회고전 개막식에서는 한국영화의 산 역사와 같은 풍경이 연출됐다. 좀처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 장길수, 이명세, 이준익 감독 등 정 감독과 같은 시대를 걸어오며 오늘날 한국영화의 위상을 만든 수십명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남부군’ ‘하얀 전쟁’ ‘부러진 화살’ 등에서 주연을 한 정 감독의 페르소나 배우 안성기도 참석해 ‘영원한 현역’의 앞날을 응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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