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 칼럼] 수구·반공몰이는 정책인가? 주술인가?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지난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 때 손바닥에 쓰인 ‘왕’(王)이란 글자가 황당했다. 유세장에서 매번 어퍼컷을 휘두를 때 어이없었다. 당선되자 풍수 술사를 앞세워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자염려스러웠다. 그때 앞으로 한국 정치 5년이 걱정스럽겠다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마구잡이 정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지하게도 항일전쟁의 역사를 뒤집으려 한다. 국립현충원의 백선엽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교내에 설치했던 항일전쟁과 독립투쟁의 영웅 김좌진·홍범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흉상을 이전하거나 철거하겠단다. 윤석열 정권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관련을 내세워 배척하고,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공비 토벌을 내세워 감싸면서 새롭게 치장한다. 나아가 그동안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다시 살피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1006명 친일반민족행위자 발표도 뒤집을 기세다.
일제 침략에 맞서 국내에선 적수공권으로 3·1만세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만주와 연해주에선 50여만 동포를 기반으로 무장한 30여 항일독립군 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강을 넘나들며 국내 침공작전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은 1920년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격파했다. 또 같은 해 김좌진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킨 대승을 거뒀다.
조선 시대 의병정신을 이은 비정규군 유격대(빨치산)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침략 군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이른바 뉴라이트 패거리의 친일식민사관을 내치고 일제 침략 시기를 반침략 항쟁의 높은 기개를 새겨 서술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위대한 항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식민지 침탈을 겪었던 많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지금 윤 정권은 이러한 100년 전 홍범도 장군의 항일전쟁 승리 업적까지 이념 색깔을 덧씌워 지우고 있다.
그동안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까지 32년에 걸친 군사반란과 권위주의 통치를 겪은 탓에 국민 뇌리에 육군사관학교는 정치군인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육사에 가해진 부정적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과거 냉전 시대에 맞춰진 교육체계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진취적 리더십을 갖춘 사관을 양성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에서 다섯분 흉상을 설치하고 그 영웅들이 민족사에 남긴 위대한 행적을 사관 양성의 정신으로 본받으려 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고 했다. 그래서 항일전쟁 승리 역사는 반갑지 않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에서 그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곧 과거사에 대한 성찰과 사과 요구를 깡패들이나 하는 짓(무릎 꿇으라!)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반공주의 친일 역사만 강조하는 정권에서 육사가 수구 놀음의 들러리가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회에 참석해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이 “우리의 통합이나 관용과 부합되는 것처럼 해석된다면, 우리의 자유·연대·통합 지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며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면서 ‘정율성 역사공원’은 육사와 더불어 현 정권이 추진하는 반공·친일 회귀정책에 어깃장 부리는 상징처럼 됐다.
정율성은 19살 때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상해·연안 등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면서 음악 공부와 창작 활동을 했다. 그가 1939년 작곡한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인민군 군가로 불려왔는데, 그렇게 50여년 애창되다가 1988년 중국 당국이 이를 공식적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했다.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40년이나 됐기 때문에 얼마든지 새롭게 중국 군대의 군가를 제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조선 청년의 작품이지만, 항일투쟁 현장에서 불리던 그대로 중국의 공식 군가로 삼은 것이다.
반면 이 나라 지도자는 정율성 고향에서 조성하는 기념공원을 대상으로 철 지난 사상 검증에 집착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으로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예술가를 공산주의자라며 공격하고 탄압했던 야만의 역사를 오늘날 한반도에서 재현시키겠다는 것인가. 입으로 ‘자유·연대·통합’을 말하면서, 벌이는 지금 행태는 언급하기조차 창피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런 시대착오적 사고로 세계 곳곳에서 모인 감수성 예민한 10대 청소년 4만명에게 나라 망신을 시키더니, 급하게 케이팝 아이돌을 동원하여 잼버리를 구해낼 술책을 꾸몄다. 하지만 그 케이팝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세계 문화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보수정치의 한계를 상징한다.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의 검증되지 않는 지도자 역량은 우격다짐의 이념 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메꾸었다. 쉽고 간편하게 휘두르는 검찰의 위세는 과거 회귀를 가져와 정치의 전제조건인 미래에 대한 진취적 전망을 내세울 동기를 앗아 갔다. 윤 대통령은 화합과 타협으로 소통하려는 뜻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리도, 사실 확인도 무시해버린 발언들을 임의로 내뱉는다.
그 이면에는 이명박 정권 참모들의 절치부심해온 복수심이 작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그들의 부추김에 따라 사실의 뒷받침도 없이 낙인찍은 대상자들을 향한 공격적 발언들을 쏟아낸 것이다. 다만 술사의 주술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역성드는 보수언론에 비위 맞추는 언술이면 충분하다.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리면서도 자기도취에 빠져 행하는 윤 대통령의 마구잡이 정치는 나라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상실했던 이승만 정치를 연상시킨다. 오직 왕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에 찼던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의 들러리가 되어 민족 분열의 길을 걸었다. 현재 윤 대통령의 정치는 이승만 시대의 행보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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