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졸업 후 프로 진출 성공 사례 ‘골밑의 파수꾼’ 브라이언 던스톤

이재승 2023. 9. 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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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7월에 작성했으며,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모비스는 지난 2008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브라이언 던스톤을 택했다. 던스톤은 프로 진출 첫 해에 한국농구에 잘 적응했다.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에 잘 녹아들었다. 크리스 윌리엄스가 떠난 후 외국 선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모비스도 던스톤이라는 새로운 중심을 얻었다.

 

대학 시절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던스톤은 뉴욕 주에서 성장했다. 뉴욕에 소재한 세인트존스 프리퍼레이터리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교를 졸업한 던스톤은 같은 주에 소재한 포덤대학교에 진학했다.
 

던스톤은 NCAA 포덤 램스에서 네 시즌을 보냈다. 4년 동안 120경기에 나선 던스톤은 118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전했다. 탄탄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것은 물론, 구력을 더할 기회도 많이 얻었다.
 

누구보다 결장이 적었던 던스톤은 4년 동안 누적 1,832점 993리바운드 294블록슛을 기록했다. 모교 기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포덤대학교 역대 선수 중 개인 누적 득점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 특히, 블록슛은 모교 출신 선수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굵직한 이력도 쌓았다. 뉴욕 주에서 뽑은 올-메트로폴리탄 퍼스트팀에 선정됐고, 3학년이던 2006~2007시즌에는 애틀랜틱10컨퍼런스에서 세컨드팀에 호명됐다. 발군의 수비력을 자랑한 던스톤은 올-디펜시브팀에도 선정되면서 주가를 높였다. 특급 선수들이 1~2학년 때 NBA 진출을 시도했기에 경쟁자가 적었던 측면도 있으나, 던스톤이 뉴욕주에서만큼은 돋보였던 것은 분명했다.

던스톤 합류 전, 2007~2008 시즌
모비스의 2007~2008시즌은 신통치 않았다. 이전 시즌에 우승을 차지했으나, 외국 선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비스에서 두 시즌을 보냈던 팀의 핵심인 크리스 윌리엄스가 팀을 떠났기 때문. 주득점원으로 나서면서도 경기 운영까지 관할했던 윌리엄스의 부재로 인해, 모비스의 전력에 큰 구멍이 생겼다.
 

제도 변경도 있었다. KBL은 이전 3시즌 동안 외국 선수를 자유계약으로 선발했다. 자유계약을 통해 들어온 수준급 선수들이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줬으나, 국내 선수들의 설자리가 크게 줄었다. KBL은 결국 외국 선수 제도를 종전의 트라이아웃 및 드래프트 형식으로 바꿨다.
 

테렌스 레더와 레지 오코사, 브랜든 크럼프와 마퀸 챈들러 등이 가세했으나, 모비스의 선발은 신통치 않았다. 모비스가 호명한 제임스 페니와 실베스터 모건 모두 2007~2008시즌 전에 내보냈다. 키나 영과 케빈 오웬스를 데리고 왔다.
 

그나마 영은 제 몫을 해냈다. 그러나 오웬스가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실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외국 선수가 불안했던 모비스는 우승 직후 다소 실망스런 한 해를 보냈다.

2008~2009시즌
모비스는 외국 선수 선발에 절치부심했다. 또, 2007~2008시즌 성적이 좋지 않았던 모비스는 2008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높은 순번을 획득했다.
 

모비스는 1라운드에서 던스톤을 호명했다. 대학 무대를 갓 졸업한 던스톤을 택한 것. 그때만 해도, 모비스의 선택은 의문점이 컸다. 그러나 던스톤은 팀에 이내 녹아들었다. 연습 경기서부터 돋보였다. 던스톤은 서장훈-마이카 브랜드를 보유했던 전주 KCC와의 경기에서도 일당백의 실력을 뽐냈다. 힘과 높이를 동시에 보여줬다.
 

다른 연습 경기에서도 다수의 블록슛을 더하는 등 모비스의 골밑을 탄탄하게 지켰다. 리그 최고 수비수인 양동근(현 울산 현대모비스 수석코치)이 군 복무로 빠졌음에도, 모비스가 정상급 수비 조직력을 유지했던 이유.
 

당시 유재학 감독도 연습 경기 후 “기본적으로 성실한 선수다. 쉬지 않고 코트를 뛰어다닌다. 국내 선수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머리도 아주 좋다. 우리 선수들 중 가장 똑똑하다. 한 번 설명하면, 단번에 이해한다”며 던스톤의 이해력과 높은 농구 IQ, 성실함을 높이 샀다.
 

다른 구단도 던스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던스톤을 막기 쉽지 않았다. 던스톤의 내구성과 체력이 다른 외국 선수에 비해 우위를 차지했고, KBL 입성 첫 시즌부터 경기당 35.1분 출전에 18.3점(2점슛 성공률 : 61%, 3점슛 성공률 : 26%, 자유투 성공률 : 66%) 10.6리바운드 2.3어시스트 3블록슛 1스틸로 맹활약했다.
 

리바운드와 블록슛 등 페인트 존 지배력과 득점력은 물론, 자신에게 오는 수비를 역이용해 국내 선수도 잘 활용했다. 던스톤이 팀의 중심을 잡자, 모비스도 35승 19패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
 

그러나 모비스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서울 삼성에 패했다. 레더와 헤인즈로 이뤄진 외국 선수 조합에, 이상민(현 전주 KCC 코치)과 강혁(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대행), 이규섭(현 SPOTV 해설위원) 등으로 이뤄진 국내 선수 조합 때문에, 모비스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2009~2010시즌
모비스는 큰 경기에서 허무하게 패했다. 그러나 던스톤이라는 확실한 중심 자원을 발굴했던 건 성공적이었다. 다음을 내다보기 충분했다.
 

핵심 전력을 확보한 모비스는 2009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던스톤의 파트너를 잘 지명해야 했다. 모비스의 선택은 압둘라히 쿠소. 빅맨 유형인 쿠소에게 던스톤의 체력 안배를 기대했다.
 

그러나 쿠소는 기대와 다른 퍼포먼스를 보였다. 체력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비스의 선택은 헤인즈. 2008~2009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모비스에 눈물을 안겼던 이다.
 

헤인즈가 가세하면서, 모비스는 높이는 낮아졌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빠른 농구를 펼칠 수 있는 여력이 형성됐다.
 

헤인즈의 합류는 주요했다. 정확한 중거리슛과 수비를 모은 후 동료를 살리는데 능한 헤인즈는 모비스에 적잖은 활력이 됐다. 그리고 유 감독이 구축한 조직적인 수비가 헤인즈의 낮은 높이를 상쇄했다.
 

또, 서장훈과 김주성을 상대로도 버틴 함지훈 덕분에, 헤인즈의 약점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국방의 의무를 마친 양동근까지 들어오면서, 모비스는 2년 연속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이전 시즌보다 5승을 더 많은 40승으로 정규리그를 제패했다.
 

던스톤의 전반적인 기록은 이전 시즌보다 낮아졌다. 하지만 출전 시간 대비 기록을 살펴보면, 던스톤의 생산력은 여전히 폭발적이었다. 정규리그 전 경기에 나선 던스톤은 평균 25.8분 출전에 14.9점(2점슛 성공률 : 64%, 3점슛 성공률 : 0%, 자유투 성공률 : 63%) 8.1리바운드 1.3어시스트 2.2블록슛 1스틸로 활약했다.
 

보이지 않는 공헌도 또한 컸다. 2년 연속 모비스와 함께 했기에, 모비스의 수비를 이전보다 더 잘 이행했다. 그리고 헤인즈의 가세 덕분에, 득점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았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김주성(현 원주 DB 감독)을 중심으로 한 원주 동부를 높이 싸움으로 눌렀던 이유.
 

동부를 꺾은 모비스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KCC와 만났다. KCC는 테런스 레더과 아이반 존슨, 전태풍과 하승진 등을 보유한 막강한 팀.
 

던스톤도 시즌 중 KCC와 맞대결에서 레더에게 고전했다. 그러나 우승이 걸려있었기에, 던스톤의 의지도 남달랐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레더의 공격을 시종일관 불편하게 만들었다. 덕부에, 모비스는 안방에서 열린 첫 경기를 따냈다. 기선을 제압했다.
 

모비스가 결국 6번의 승부 끝에 웃었다. 구단 역사상 세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2006~2007시즌 이후 3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시리즈 내내 발군의 기량을 선보인 함지훈이 챔피언 결정전 MVP에 선정됐지만, 던스톤도 빛났다. 골밑 지배력과 내구성이 팀을 빛나게 했다. 그러나 던스톤은 우승 후 NBA 진출을 노렸다. 유재학 감독이 끈질기게 설득을 했음에도, 던스톤은 도전 의지를 보였다.

한국을 떠난 이후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던스톤은 NBA에 진출하지 못했다. 서머리그에 나서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KBL에서도 검증 받지 못한 신장이 발목을 잡았다. 수비력으로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NBA에 진출하지 못한 던스톤은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스라엘과 이탈리아를 거친 그는 유럽에서도 수준급인 그리스리그와 터키리그를 거쳤다. 그리스리그에서도 최고 수비수에 선정됐으며, 2015년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터키에서는 유로리그 우승과 유로리그 블록슛 1위, 최고 수비수 등 발군의 기량을 자랑했다. 유럽에서도 수준급 선수로 거듭났다.
 

그런 그가 지난 2014~2015시즌 후반에 울산팬들을 찾았다. 유재학 감독이 KBL 역대 감독 중 최초로 정규리그 500승을 달성했고, 던스톤은 이날 경기 후 영상으로 유재학 감독의 업적을 축하했다.
 

던스톤은 영상에서 “세계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다. 함께 한 지도자 중 최고였다. 내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점을 지도해주셔서 감사한다. 감독님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며 유재학 감독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장을 찾은 유재학 감독도 “울컥했다”며 감동의 말을 건넸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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