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LP로 만났던 걸그룹, 뮤지컬로 또 한번 꺼내보네
김시스터즈·희자매 등 히트곡 시대별로 선봬
경성조선극장부터 미8군부대까지 무대 눈길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연출가 박칼린
축음기의 바늘이 레코드판에 떨어진다. 흑백 무대 위로 머리를 풍성하게 틀어 올리고, 미니 드레스를 입은 3인조 걸그룹의 노래가 흐른다.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라는 가사('성자의 행진')와 춤은 물론, 악기까지 연주하며 무대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미국 무대에 진출한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무대다.
걸그룹의 선조 격인 '시스터즈'의 역사는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조선악극단 여성 단원들로 구성된 '저고리시스터'의 탄생과 더불어 1953년에는 그 멤버이자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자신의 두 딸과 조카를 '김시스터즈'로 데뷔시켰다. 이후, 1960년대 윤복희의 '코리안 키튼즈', '울릉도 트위스트'를 부른 '이시스터즈', 쌍둥이 자매 '바니걸스' 그리고 인순이의 '희자매'까지. 쇼 뮤지컬 '시스터즈(SheStars!)'는 한국 가요사에 족적을 남긴 걸그룹의 역사를 그들의 히트곡과 함께 한 무대에 올린다.
지난 9일,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시스터즈(SheStars!)'의 연출가 박칼린을 만났다. 근처 스튜디오에서 뮤지컬 녹음 작업을 끝내고 온 그+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자마자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 듯, 시스터즈의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가신 이난영 선생님을 제외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선생님들을 다 만나 뵈었어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요"라며 운을 뗀 그의 목소리에서 작품을 준비하며 느꼈던 설렘과 기대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쇼 뮤지컬 '시스터즈(SheStars!)'는 한국 걸그룹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번 작품의 주제를 '시스터즈'의 이야기로 선정한 계기가 있나요?
"작품을 구상하며 특별히 무언가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관객들이 공연장에서 즐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그래, 이런 분들이 있었지'라며 그들을 떠올리고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이 작품은 무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지금까지 무대에 섰던 분들의 역사를 돌아보다 '시스터즈'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일제강점기, 전쟁 등을 겪으면서도 음반을 내고, 히트곡을 선보였던 선배들을 재조명하고 싶었어요."
◇흑백 사진 속의 영광이 무대로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준비하며 부담은 없었나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한 분 한 분 모두 직접 뵙고 설득했어요. 이전에 함께 작업한 적 있는 윤복희 선생님은 "왜 찾아왔어, 그냥 해"라고 하셨지만, 선생님들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고, 연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이시스터즈'의 김희선 선생님께 전화했을 때, 통화연결음이 이시스터즈의 히트곡 '워싱턴 광장'이었어요. 연락이 닿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선생님 연락처가 맞았던 거죠.(웃음) '바니걸스'의 고재숙 선생님은 "언니들 만나서 커피도 한잔하고, 너무 좋겠다"라고 하면서도 함께 활동했던 쌍둥이 언니(고정숙, 1955~ 2016)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어요. 선생님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앞으로 시스터즈의 무대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살아 숨 쉬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죠."
-시공간을 초월해 선보일 시스터즈의 무대가 벌써 궁금해지는데요. 각 시대와 그룹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의상과 무대를 준비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 같아요.
"당시의 사료와 논문들을 찾아보며 최대한 사실 그대로 고증하려 했지만, 사진이 대부분 흑백이다 보니 의상의 색이나 조명 등은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며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작품 속 시스터즈의 인생사가 담긴 6개의 챕터 구성이 모두 달라요. 의상과 음악 등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풀어낸 장면이 있는가 하면, 뮤지컬적으로 재해석한 장면, 과거와 현재의 음악이 교차하는 장면도 있죠."
-음악이 중요한 주크박스 뮤지컬로서, 작품에 등장하는 히트곡들이 관객의 기대 요소 중 하나일 텐데요. 곡 선정에 기준이 있었나요?
"역사적 사실과 대본에 맞춰 곡을 선정했어요. 음악보다는 드라마가 우선이었던 거죠. '처녀합창'은 '저고리시스터'의 노래 중 유일하게 기록이 남아있는 곡이었어요. '이시스터즈'는 히트곡이 정말 많은 그룹이지만, 그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울릉도 트위스트'를 골랐고요. '코리안 키튼즈'의 윤복희 선생님은 저희가 작품을 준비하며 "누구도 선생님의 에너지를 못 따라간다"라고 했을 만큼 '미친 공연'을 선보였죠. 그래서 당시 공연 장면을 재연하고 싶었어요. 사실, 음악으로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담으려고 했어요. 전주를 듣자마자 음악을 들었던 그 시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음악이 지닌 힘이니까요."
◇이 또한, 우리들의 삶
'시스터즈(SheStars!)'는 시대별로 챕터를 나눠 각 걸그룹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제강점기의 경성 조선극장부터 미8군부대, 에드 설리번 쇼 무대까지, 시스터즈의 삶과 무대를 선보인다. 작품 속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7명이지만, 이들은 각각 여러 배역을 소화한다. 유연·신의정·김려원·선민·하유진·이예은·정유지·정연·이서영·홍서영이 시스터즈의 주요 배역을 번갈아 맡고, 극의 유일한 남배우인 황성현은 극의 해설자와 여러 역할을 겸한다. 박칼린은 이러한 일인다역을 통해 "저 또한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모두가 동등하게 함께 빛나고, 받쳐주는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개성이 또렷한 가수들인 만큼, 각 배역에 맞는 배우들의 음색과 이미지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캐스팅 비화도 궁금합니다.
"이미지에 대한 걱정은 안 했어요. 이미지를 맞추려고 한 적도 없고요. '바니걸스'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얼굴도, 키도 다르지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흰 완벽한 쌍둥이었어요"라며 노래를 합니다. 특히, 각각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맡아 어느 장면에서는 '김숙자', 다른 장면에서는 '윤복희'로 등장하죠. 당시의 시스터즈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그분들의 가진 가수로서의 에너지를 무대에 담고 싶었어요."
-시스터즈뿐 아니라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요. 작업할 때 많은 분이 "그래서 누가 주인공이에요? 앙상블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묻곤 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아뇨. 우리는 모두가 동등하게 무대에 서요." 한 명의 배우가 주역을 맡았다가 악역을 맡기도 하고, 앙상블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작품 속 시스터즈의 삶처럼 관객들에게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느낀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장면은 재밌는데, 대사를 하다가 눈물이 난다는 이야기를 해요. 사실 저도 연습 중에 선생님들과 전화하면 울컥하게 돼요. 선생님들이 이뤄낸 역사를 이어받고, 그 역사 안에 저 또한 포함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작품 속 시스터즈의 이야기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뮤지컬 배우)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연출가로서 작품에 추구하는 바와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최근 한국의 창작 뮤지컬들은 외국 소재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오히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제가 한국 소재 작품을 하고 있죠.(웃음) 한국 관객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해서 작품을 정하진 않아요. 창작자로서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작품을 구상할 땐 일상에서 꽂히는 무언가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곤 하니까요. 다만, 한국에는 5천 년의 유구한 역사가 있잖아요. 그 시간 안에 담긴 소재는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보다 훨씬 많죠. 내년에는 국립창극단과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2024. 6.26~30, 국립극장 해오름)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전통 한지와 종이접기를 소재로 무속음악을 다룹니다. '시스터즈(SheStars!)'와는 전혀 다른 장르지만, 작품을 만들 때 스토리에 충실해야 된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두 작품 모두 오랜 시간 열심히 준비한 만큼, 재밌게 즐겨주세요!"
글 월간객석 홍예원 기자·사진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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