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격 성차별 손해액 인정 땐 국내 최초…‘산정 기준’ 쟁점[성별임금격차와 싸우다]
KEC 민사소송 항소심에서 법원이 임금 차액에 대한 손해 배상을 인정하면 국내 최초로 승격 성차별로 인한 손해를 배상받는 사례가 된다. 해외에선 이미 구글·골드만삭스(미국), 시바신용금고·쇼와셸석유(일본) 등의 여성 노동자들이 소송을 통해 승격 성차별에 대한 손해를 인정받았다.
1심 재판부는 직접 증거가 없더라도 통계 증거를 바탕으로 차별을 사실로 인정했다. KEC는 공개된 취업규칙, 경영진 발표, 관리자 진술 등에 성별에 따라 승격 차등을 둔다는 내용은 없다. 차별의 직접 증거가 없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허명회 성신여대 석좌교수는 2021년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발표한 ‘고용 성차별 시정제도 개선방안 연구’에서 한 요인이 다른 변수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통계학 방법론 ‘피셔(Fisher) 검정’을 통해 우연히 남성 56명 전원이 S4등급 이상으로 승진하고 여성 52명 전원이 J3등급 이하에 머물 확률은 사실상 0이라고 증명했다.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 위원은 “통계 증거로 노조 간 차별을 인정한 사건은 있었으나 고용 성차별 사건에서는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라고 말했다.
“1심 재산상 손해 청구 기각 ‘논란’”
그런데 승격 차별로 인한 재산상 손해 규모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성차별이 없었다면 여성 노동자가 현재 어느 직급, 직위까지 올라갔을지 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고 측은 같은 연도에 입사한 남성 동기를 기준으로 임금 차액을 계산했지만 1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구 위원은 “이 사건은 10~20년에 걸친 장기간(2~4회) 승격 과정에서의 차별이 쟁점이기 때문에 손해액 산정 기준이 복잡하다”면서도 “근속연수에 따라 승격이 결정되는 경향의 사업장에서 입사 시기가 같은 남성의 현재 등급을 기준으로 손해액을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 대응”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일본 법원은 시바신용금고 사건(2000년), 쇼와셸석유 사건(2007년) 판결에서 장기간의 승격 차별에 대한 재산상 손해배상을 인정했는데, 이 판결에서도 원고인 여성과 같은 시기 입사한 남성의 현재 직급, 직위를 기준으로 손해액을 산정했다.
1심 재판부가 위자료를 일부만 인정한 것도 논란이 있다. 법원은 위자료를 받기 위해서는 장기간·지속적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는 등 근거가 더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구 위원은 “이런 논리를 적용할 경우 차별이 누적되어야 정신적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며 “노동 현장에서 성차별을 경험한 여성의 존엄을 고려했을 때 한계가 있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항소심 손해액 인정되면 ‘최초’
원고 측은 항소심에서 손해액 산정을 어떤 방식으로 주장할지 고민 중이다. 승격은 개인 차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개인 차를 빼고 성별 차이를 어떻게 추출해 내느냐가 관건이다. 법무법인 여는 정이량 변호사는 “이 사건은 승격 차별이지만 임금 차별이기도 하다. 승격을 차별하는 이유는 임금을 차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사 측은 여전히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원고들과 남성 근로자들 사이에 발생한 승격 차이는 채용 경로, 수행 업무 등에 따라 합리적 이유가 존재하는 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송의 결과에 따라 국내에서도 승격 등 성차별에 대한 손해가 법적으로 배상이 가능하다는 판례가 마련될 수 있다. 최정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상교수(변호사)는 “회사 측은 원고가 손해 산정 방법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항소심에서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해 최대한 합리적인 방안을 법원이 선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손해액을 산출하는 것은 법원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차별했을 경우 법적으로 재산상 손해를 배상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사회가 조금 달라질까. 최 교수는 “이 사건에서 재산상 손해가 인정되면 다른 기업들도 차별은 ‘돈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서는 성차별 뿐 아니라 장애 차별 등 차별에 대한 재산상 손해를 인정받은 사례가 드문데 이제 사법적 구제를 통해 차별로 입은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 근로 감독은 없었다
여전히 노동부 근로감독 단계에서 차별이 구제되기 어렵다는 점은 문제다. 구 위원은 “지방고용노동청에서 성별 임금 격차가 뚜렷한 사업장만 점검해 보아도 드러낼 수 있는 문제인데 정부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성별 격차는 전체 성별 임금 격차만 발표되는 수준이다. 신한은행이 2013년, 하나은행이 2015~2016년 성별 합격자 비율을 조정해 채용에서 여성을 차별했지만 법인은 고작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신한카드는 2018년 채용에서 서류 합격자 성비를 미리 정해둔 것이 문제됐지만 법원은 신한카드 부사장과 법인에 각각 500만원을 선고했다. 구 위원은 “KEC 사례처럼 장기간 지속된 성차별을 고용노동부가 선제적으로 모니터링하거나 조사에 들어간 사례가 없는 것이 문제”라며 “구글 성차별 사건은 연방노동부가 먼저 데이터가 이상하다는 점을 포착하고 자료를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이같은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labor/article/202309071754001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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