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제작자 된 은행원 “무모한 자신감이 도전 밑천”
[서울&] [다시, 시작]
정치인 꿈꿨던 청년 은행원이 된 뒤
변두리 지점 2년 만에 1위 만들었지만
‘지급보증 호텔’의 태풍 매미 피해 뒤
2004년 퇴사해 “화병이 무엇인지 경험”
2008년 마케팅 맡으며 뮤지컬과 인연
제작자 변신, ‘K뮤지컬 성공 소재’ 찾아
‘싯다르타 생애’의 작품성에 주목하고
뮤지컬 만든 뒤 성공 위해 ‘365일 노력’
17년 차 은행원이 뮤지컬 제작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은 뮤지컬 <싯다르타>의 제작자 김면수(63) 엠에스엠시(MSMC) 대표다. 예술계 인물 중에 은행원 출신은 흔치 않은데, 어떻게 그는 변신에 성공했을까?
김 대표의 어릴 적 꿈은 의외로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꿈을 포기한 게 은행 퇴직하면서죠.” 성인이 돼서도 정치인을 꿈꿨다니 그가 좀 특이해 보였다. 그는 1979년 동국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행시에 합격해 고위공무원이 된 뒤 지방자치단체장을 거쳐 정치인이 될 계획을 세웠다.
1학년 때 그는 불교 관련 수업을 들었고, 2학년까지 불교학과 학생이 주로 기숙하는 ‘기원학사’에서 생활했다. 기원학사 아침 예불에 그가 매일 참석하며 부처님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
그가 도서관에서 행시 공부를 하다보면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앞으로 나라 운영을 어찌할지 고민하느라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행시 도전이 힘들어지자 1986년 전국적 조직이 있는 ㄱ은행에 입사했다. 정치인이 되는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성과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지자체장 그리고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영업실적이 좋았던 김 대표는 2001년 비교적 이른 나이로 ㄱ은행 양재물류센터 출장소 소장이 됐다. 다음 해는 변두리 지점의 지점장이 됐다. 실적이 좋은 지점이 아니었는데, 그가 지점장이 되고 2년 만에 지점은 전국 1등 성과를 올렸다. “적금 들어달라, 이런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면 되지. 그게 바로 점장의 역할이에요.” 고객과 친해지면 실적은 저절로 따라왔다.
그때 부산의 호텔 대표를 만날 일이 있었다. 호텔은 운영자금 10억원이 필요했다. 호텔 대표는 다른 곳에서 대출받으며 김 대표에게 지급보증을 부탁했다. 당시 김 대표에게 10억원 지급보증은 큰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호텔도 사업성이 있어 보였다. 그가 대출 보증을 서준 호텔은 2003년 태풍 매미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 결국 그가 10억원을 고스란히 갚아야 했다.
당시 금융사고가 빈번해지면서 그의 지점에도 감사가 들어왔다. 감사는 그의 통장 내역을 살폈다. 이른 나이에 실적을 올린 그에 대한 견제도 있었다. 결론은 ‘문제없음’이었지만, 이후 재감사가 진행되자 2004년 그는 퇴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제기된 모든 사안에 대해 나가는 그가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믿고 따라준 직원들이 조직에서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은행을 나와 무슨 일을 하든 잘할 자신이 그에게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시절이죠.”
퇴사하자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그때 화병이 뭔지 알았어요. 잠을 자지도 먹지도 않았어요.” 화병이 그를 잠식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혼술하는 버릇이 없었던 거였다. “만일 혼술을 했다면 분명 알코올중독자가 됐을 거예요.”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2008년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의 총감독으로 일하는 선배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이 만드는 뮤지컬 <미스 피가로>의 마케팅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공연 마케팅을 하면서 점차 공연예술에 대해 알게 됐다.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의 다음 공연은 뮤지컬 <홍길동>이었는데, 그는 기획 단계부터 함께하며 공연 전반을 배웠다. 그런데 그를 공연계로 끌어들인 총감독이 외국으로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선배의 빈자리를 그가 메워야 할지 아니면 그도 함께 일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됐다. 꿈이 컸던 그로서는 성공을 경험하지 못하고 공연계를 떠나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제작자가 된 그는 <한국방송>(KBS) 애니메이션 <후토스>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뮤지컬 <후토스>로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예술계 출신이 아니라 힘들었던 점은 무엇일까? “예술계 사람이면 500만원 내면 될 일을 저한테는 그 두 배는 내라고 하는 거죠. 저는 인맥도 없고 하니까.” 그는 그런 수업료를 무수히 냈다.
그는 송파구의 지원을 받아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역에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을 준비했다. 2013년 7월에 뮤지컬 <미스터 온조>의 첫 공연이 열렸다. 가수 홍경민씨도 <미스터 온조>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김 대표는 전세계에서 케이(K)-뮤지컬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소재를 찾았다. 마침 예수의 삶을 담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생각났다. 세계 3대 성인 중 한 명인 ‘싯다르타’의 생애를 담은 뮤지컬을 잘 만든다면 전세계를 상대로 공연하는 케이-뮤지컬이 탄생할 거 같았다.
2019년 9월에 뮤지컬 <싯다르타>를 초연했다. 그리고 다음 해 두 번째 공연을 하려는데 코로나19가 터졌다.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실행되면서 뮤지컬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대형극장 뮤지컬 공연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안정적 자금 확보를 위해 김 대표는 선구매 서비스를 도입했다. 한 계좌에 100만원씩 지금까지 총 600계좌를 팔아서 6억원을 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금이 부족하다.
뮤지컬 <싯다르타>는 지난 8월 중순 강원도 속초에서 공연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김 대표가 상당한 수준의 뮤지컬 공연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스태프 등 안정적인 인력풀이 있어서 가능한 거 같다. “제일 고생하는 건 김미영 제작이사이고요. 뮤지컬은 종합예술이라 스태프 모두 다 중요해요. 어느 한 파트도 ‘빵구’ 나면 안 되죠.”
인생 2막에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김 대표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무모한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도전을 안 하는 것이 좋겠죠. 자신의 재능을 팔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고요.” 이런 그에게 가족들은 뭐라고 할까?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아내가 외국에 있어요. 같이 살면 뮤지컬 제작은 절대 못 했겠죠. 내가 사고를 하도 쳐서 그런지 아이들은 착하게 컸어요. 다행이죠.”
정치인이 되려 했던 김 대표는 이제 <싯다르타>를 위해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뛰고 있다. “어쩌면 제가 동국대 기원학사에 들어간 거나, ㄱ은행을 그만둔 거나 다 <싯다르타>를 만들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나 싶어요.” 브로드웨이에 케이-뮤지컬 전용관을 갖고 싶다는 김면수 대표의 도전을 응원하고 싶다.
강정민 작가 ho089@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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