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7.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삼성산 자락에 천년의 시공간을 아우른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에서 만난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은 고려 천년의 기억과 대한민국 건축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문화예술재단(이사장 최대호)에서 운영하는 김중업건축박물관은 2014년 3월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건축 전문박물관이다. 안양시가 설립한 공립박물관 두 곳이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이 1959년 설계한 유유제약 공장의 사무실을 구조 변경한 것이다.
■ 김중업의 흔적과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
1959년 완공해 2004년까지 사용된 이 건물의 문화적 가치를 주목한 안양지역의 시민과 건축가들이 유유산업의 부지와 건물을 안양시가 매입해 건축박물관으로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건축가와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안양시는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2014년까지 리모델링해 김중업건축박물관을 개관했다. 이러한 역사를 가졌기에 김중업건축박물관에 대한 안양시민들의 사랑과 기대는 각별하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 가려면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시대 삼층석탑부터 만나야 한다. 4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고려시대 안양사(安養寺) 명문기와가 출토된 현장을 둘러보며 박물관이 들어선 터가 그야말로 명당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안양이란 지명이 유래된 터전에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안양의 뿌리와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외관부터 독특하다. 갈비뼈처럼 밖으로 훤히 드러낸 외벽의 하얀 기둥과 2층 복도 좌우로 낸 세련된 창문은 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감각적이다. 멋진 산과 맑은 계곡을 품은 언덕에 자리 잡은 김중업건축박물관 앞에 서면 마음이 여유롭다. 건축가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장은 1층 ‘김중업, 건축예술의 문을 열다’와 2층 ‘김중업, 건축예술을 완성하다’로 구성돼 있다. 평양에서 태어난 소년 김중업이 한국의 대표 건축가로 성장하던 여정을 보여준다.
1부 ‘청년, 꿈을 키우다’는 시와 미술을 사랑했던 소년 김중업이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에서 수학하며 예술로서의 건축관을 다진 사실을 확인한다.
2부 ‘건축가의 여정과 도약’은 1952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의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가 우연히 만난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문하에 들어가 활동한 내력을 살펴본다. 파리 ‘아틀리에 르 코르부지에’에서 동료들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이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김중업은 세계의 여러 건축가와 교류하며 선보인 1950년대 건축 작품 전시회를 국내에서 연 사실도 놀랍다. 청년 김중업의 얼굴에서 넘치는 끼와 야망을 찾아본다.
3부 ‘한국 건축예술을 대표하다’는 서구 근대 건축과 한국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에필로그 ‘건축가의 길’은 당대에 출판된 건축 잡지와 서적에 실린 그의 말과 글을 통해 김중업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전시실 맨 끝에 쉴 수 있는 체험 공간은 쉼터다. 작은 책상에 앉아 색연필을 들고 김중업의 작품 도안에 색칠을 하며 숨을 고른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대가로 성장한 김중업의 작품세계가 산맥처럼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이르는 시기다. 김중업의 건축 설계도면과 사진을 활용한 권민호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 ‘도면의 춤’을 감상하며 건축이 종합예술임을 거듭 확인한다.
1부 ‘건축, 살아 있는 선’은 제주대학교 본관, 서산부인과 등 건축가 김중업이 부드러운 선의 이미지를 활용해 펼쳐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여준다.
2부 ‘건축, 시대를 이끌다’는 1971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날카롭게 비판해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받아 해외로 추방되기 전 설계한 고층빌딩 작품을 소개한다. 중년들의 기억에 여전히 살아있는 ‘삼일빙딩’은 이 시기 김중업의 대표작이다.
3부 ‘건축, 삶을 꿈꾸다’는 개인주택 설계 작품들이 중심이다. ‘집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구현된 작품들과 마주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4부 ‘건축. 세계로 나아가다’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서 추방돼 프랑스와 미국을 떠돌며 생활하던 시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건축가의 열정과 노력을 보여주는 작품과 설계안을 보여준다.
5부 ‘김중업, 한국 건축에 새겨지다’는 김중업이 1979년 귀국해 작업한 작품과 1988년 작고하기까지 김중업건축연구소 직원들과 함께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층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건축과 예술의 생명력을 생각해 본다. 김중업 건축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복도를 활용한 에필로그 ‘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문학과 미술, 춤 등 국내외 예술가들과 교류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토지’의 작가 박경리를 찾아 원주에 갔던 사실을 기록한 친필 메모도 찾아볼 수 있다.
■ 70년 세월을 건너 온 ‘어느 건축가의 흔적’
지난 6일 개막한 상설기획전 ‘어느 건축가의 흔적’은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2023 안양시 승격 50주년 기념전 ‘안양연화’를 둘러본 관람객들이 ‘어느 건축가의 흔적’을 감상하기 위해 야외로 몰려간다. 철근이 튀어나온 건물 기둥과 기둥조각, 테두리 보와 바닥재들 사이에 깃든 사연을 살펴보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 콘크리트 기둥이 서게 된 까닭이 재밌다. 2018년 주한 프랑스대사관 신축 계획으로 집무실 건물의 철거가 결정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중업건축박물관 관계자들이 서둘러 프랑스대사관을 방문해 특별한 협조를 요청한다. 이렇게 해 주한 프랑스대사관 집무실 건축부재 43점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날렵한 지붕 처마로 유명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작품으로 김중업은 1962년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1965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를 얻었으며 프랑스 공인 건축가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건축을 예술의 범주로 끌어 올렸다고 호평 받았던 작품의 콘크리트 기둥을 비롯한 건축부재들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안양사 주춧돌과 함께 공존하게 된 것이다.
■ 시민들이 되살린 역사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지난해 ‘육군박물관’으로 무애25년건축상을 수상한다. 2014년 제정된 무애25년건축상은 25년 이상 지난 국내 건축물 중 현대까지 건축-공공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을 선정해 한국건축가협회가 건축주와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수상작인 육군박물관은 김중업이 1982년 설계한 작품으로 당시 대한건축사협회가 주최하는 한국건축전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해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획전 ‘김중업, 건축예술을 완성하다’를 통해 김중업 건축의 전모를 살피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김중업건축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실시한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에서 안양박물관과 함께 인증기관으로 선정됐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연구사업 지표’에서 만점을 받아 2회 연속 인증기관에 선정된 것이다.
한편 박물관은 시민참여 교육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23 김중업건축박물관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어린이 건축학교’는 4주 동안 진행되는 어린이 전문 건축 교육프로그램이다. ‘어린이 건축학교’는 현직 건축가들과 함께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건축 이론을 배우고, 건축 공간을 직접 스케치하며, 목재를 이용해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보는 재미있는 시간도 가진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박물관으로 문의하기 바란다.
안양예술공원 언덕에 자리 잡은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성찰과 사색의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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