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혐오 시대에 ‘젠더’ ‘페미니즘’을 가르친다는 의미 [플랫]

유선희·플랫팀 기자 2023. 9. 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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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혜민 한예종 예술과젠더연구소 강사가 필수 교양과목인 ‘예술가의 젠더 연습’ 강의를 하고 있다. 유선희 기자

“서울 서초동 초등학교 사건 49제가 어제(4일) 있었는데요. 그 사건이 저한테 주는 타격감이 좀 있었어요. (젠더 분야) 필수 교과목을 가르치는 담당자로서 특히 더 ‘노동자’인 제 위치를 알게 된 계기가 됐거든요.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고작 방학을 지났을 뿐인데 일터에 무사히 복귀한 느낌입니다.”

지난 5일 오혜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예술과젠더연구소 강사가 ‘예술가의 젠더 연습’ 수업 시작에 앞서 복잡했던 자신의 마음을 꺼냈다. 개강 전부터 이 말을 할까말까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도 학생들 얼굴을 보니 “반갑다”며 “‘나는 이 일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를 다시 확인한다”면서 웃었다.

‘예술가의 젠더 연습’은 한예종에 입학한 대학생이라면 필수로 수강해야 한다. 한예종은 2019년 ‘문화계 미투’ 이후 올바른 성평등 기준을 세우자는 목적으로 이 과목을 공통 필수 교양과목으로 편성했다. 연극원을 시작으로, 미술원과 음악원 등 6개원 모두로 확대했다. 일반 대학교에서 ‘젠더’ 분야를 교양과목으로 신설한 곳은 더러 있지만,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곳은 한예종이 유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오 강사는 한예종에서 필수 교양과목인 ‘예술가의 젠더 연습’과 선택과목인 ‘페미니즘 입문’ 수업을 담당한다.

이날 오후 기자는 영상원 분반의 ‘예술가의 젠더 연습’ 첫 강의를 함께 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오 강사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올해로 5년 차다. 새로운 학생들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다. 수업 자체에 반감을 가진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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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동안 진행될 수업을 소개하면서 오강사가 입을 열었다.

“처음 강의를 시작한 2019년 2학기 때와 지금의 분위기는 다른 것 같아요. 주제는 더 심도가 깊어졌는데, 의견이 충돌하는 범위는 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수업에 반감이 있는 학생들은 대놓고 딴짓을 하고 제게 공격하는 말도 서슴지 않은데, 수업하면서 느끼는 건 누군가에게는 이 공간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다’는 겁니다. 이 수업이 예술가로서 살아갈 여러분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과 시야를 제공해주는 도구가 됐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의 적합한 언어가 생길 때 그 재미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오 강사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작 때 다소 경직돼 있던 학생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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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젠더 연습’ 강의에서 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 유선희 기자

오 강사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저는 가정폭력 생존자다. 설명할 언어를 찾는 과정에서 여성학을 만났다”며 “정체성 없는 여성학은 없다. 내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언제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생애주기 그리기’ ‘언어 찾기’ 등을 강의에 담아 가르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성차별 문제 자체에 ‘반감’부터 드러내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쓴다. 그는 “적대감을 완전히 해소할 순 없어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의 지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초동 초등학교 사건도 결국 “젠더관점에서 봐야 한다”는게 오 강사의 설명이다. 그는 “선생님은 ‘여자한테’ 좋은 직업이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잖나. 이 말엔 생계부양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동시에 방학이 있고 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으니 출산과 양육 조건에도 최적이라는 생각이 담겼다”며 “처우가 낮은 비전임 교원만 하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다. 경력이나 실력과 관계없이 성별에 따른 가치평가가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기혼이나 미혼 상관없이 자립하려고 노력한다. 자립하는 조건에서 자기 노동을 바라보는 첫 세대인데도, 여성 노동자는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며 “젠더관점에서 노동문제를 들여다보고,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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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나서 성별 갈라치기 흐름을 주도하고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이 시국에서 ‘젠더’ ‘페미니즘’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명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오 강사는 “요즘처럼 ‘페미니즘’을 마치 사회악으로 공격하고 용어 자체를 부정하는 때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는 제대로 ‘말’ 해야 한다”며 “학생들이 앞으로 연기,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젠더 의식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단순히 가르치고 알려준다는 의미를 넘어 사명감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yu@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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