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고 호기심 많은 ‘식용’ 오리에 압도당하다

한겨레21 2023. 9. 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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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수의사의 동물일기]우연히 이 지구의 어딘가에 태어나 생존 투쟁을 하며 고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어 사라지는 존재, 동물도 우리처럼
머스코비오리. 블로그 ‘율전과 율리야의 작은공간’ 제공

진료실 밖이 소란스러워 병원 접수대 쪽으로 나가보니 새가 서 있었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우뚝 선 새는 문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개를 안고 진료를 기다리던 보호자들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 있는 게 보였다. 새는 낯선 곳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목을 길게 늘여 병원 이곳저곳을 둘러봤고 천천히 발을 떼어 움직이려 했다.

목을 위로 뻗은 상태에서 녀석의 머리는 내 허리 높이까지 왔다. 씩씩하고 호기심 많은 생명체인 것 같았다. 작은 비늘로 덮인 크고 튼튼한 다리에 연결된 노란 발가락, 발가락 사이의 물갈퀴가 보였다. 몸통은 매끈하게 잘 정리된 검은 깃털로 덮였고 얼굴과 목의 깃은 검은색이 군데군데 섞인 크림색이었다. 눈 주변은 털이 없는 진홍색 피부로 덮여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순식간에 주변을 배경으로 만들고 자기만 부각하는 압도적인 외모였다.

주변을 정리하다 고개 드니 새가 내 앞에…

이 새가 우리 병원에 온 이유 역시 특별했다. 구조자는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작업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마당 안에 이 녀석이 서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들어온 듯한데, 텃밭 정리를 하며 한곳에 모아둔 배춧잎 등을 입으로 들추고 있었다. 야생동물인 것 같아서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발가락 사이 물갈퀴, 납작한 부리, 상당히 큰 덩치를 보면 거위와 가까워 보였다. 거위는 가축화된 기러기다. 이 녀석은 야생 기러기일까? 하지만 이 새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녀석의 이름은 머스코비오리(학명 Cairina moschata). 남아메리카의 야생 기러기를 품종 개량해 유럽, 대만 등지에서 식용 목적으로 사육한다고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국내에서 기러기가 식용 가능해진 지는 5년이 채 되지 않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8년 축산법을 개정해 기러기를 가축 대상에 포함했다. 머스코비오리는 기러기의 야생성이 남아 있어 질병과 추위에 강하고, 사양 관리 기술이 없는 초보자도 손쉽게 키울 수 있는 축종으로 축산농가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대책의 하나로 도입됐다.

가축은 야생동물구조센터의 구조 대상이 아니고, 소유자를 찾아 돌려보내는 게 원칙이다.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니 구조자가 새를 데리러 병원에 오기로 했는데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내가 그 새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은 30분. 녀석은 처치실의 모든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목은 탄성 좋은 용수철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빠르면서도 섬세한 운동은 부리를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가닿게 했다. 납작한 부리로 처치실 안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공중으로 툭 던지기도 했다. 주변을 정리하다 얼굴을 들어보니 녀석이 내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털이 없는 강렬한 붉은색 피부로 둘러싸인 작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응시했다. 따뜻한 노란색의 작은 홍채, 홍채 안의 검은 동공.

나는 사람과 다른 표정을 지닌 비인간 동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과의 소통에서 표정은 중요하다. 표정 뒤 숨은 사람의 진짜 의도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자주 실패하고, 그런 일상은 피곤하다. 인간의 표정은 다양한 안면 근육의 조작으로 만들어진다. 훈련하면 정교하게 조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비인간 동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내 뇌에 휴식을 준다.

그중 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그 휴식의 깊이가 더하다. 군더더기라곤 없는 새의 무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한 반복되는 생각의 회로가 잠시 멈춘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내일의 걱정을 잊어버린다. 처음 만난 머스코비오리의 작은 동공 안 심연을 바라보면서도 내게 짧은 휴식이 찾아왔다. 3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2020년 39만 마리, 2023년 6만 마리 새 살처분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구조자는 우선 마을회관에 오리를 묶어두고 주변 오리농장을 수소문하겠다고 했다. 오리가 돌아가고 다음 진료를 보는데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까 이 녀석이 야생동물이 아닌 식용 오리임을 확인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야생동물이라면 지역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동물을 인계해 돌보거나 방생한다. 하지만 식용 새라면 구조 이후의 운명은 달라진다. 다시 농장으로 돌아간 새는 고기와 알을 생산하는 목적으로 살 것이다. 게다가 내가 사는 지역에선 거의 매년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생기고 있다. 발생 농장에서 3㎞ 이내 가금류는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라 예방적으로 살처분한다. 2020년 근처 오리농장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로 새 39만2천 마리가 살처분됐고, 불과 6개월 전인 2023년 2월에도 인근에서 새 6만3천 마리가 산 채로 땅에 파묻혔다. 생각해보니, 오늘 만난 머스코비오리는 그 지옥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병원은 환자를 살리는 곳이다. 하지만 농장 동물에게 병원은 다른 원칙을 적용한다. 치료비가 출하 비용을 초과할 때 동물은 치료받지 못하고 도태된다. 어떤 종(種)인지에 따라 병원에서 다른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 이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좀처럼 편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 진료라는 노동을 반복하며 내가 변화했기 때문인 것 같다. 진료는 각 개체가 속한 종의 유전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이 환자가 살아온 환경, 개체의 고유한 특징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치료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군집으로서의 동물군(群)이 아닌 개별자로서 갖는 그들의 고유함에 집중한다. 반복되는 진료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들도 인간인 우리처럼 우연히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태어나 생존 투쟁을 하며 고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어 사라지는 존재임을 말이다.

남미의 야생 기러기가 한국 땅에서는

오늘 만난 머스코비오리라는 이름의 기러기를 떠올렸다. 페루에서는 품종 개량되기 전의 이 기러기가 지금 야생에서 산다고 한다. 인간의 주거지역을 피해 열대의 나무 구멍에서 번식한다. 식용으로 품종 개량된 남미의 야생 기러기가 매년 겨울 대한민국의 땅에 파묻히는 현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기원했다. 오늘 만난 녀석이 전염병을 이유로 또 다른 살처분에 희생되지 않기를, 다음 날과 그다음 날도 즐겁게 맞을 수 있기를,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는 고통이 없기를. 세상을 떠난다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허은주 수의사·<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저자

*‘시골 수의사의 동물일기’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와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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