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달러 향하는 유가…출렁이는 물가 속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기업 채산성·무역에도 악영향…"소비 둔화·성장률 저하 가능성"
더딘 중국 경제 회복·이란산 공급 등은 유가 상승 억제 요인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국제유가가 최근 급등하면서 팬데믹 경기 부양 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각국 경제에 경고음이 들어왔다.
최근 국제유가는 10개월 만에 배럴당 90달러(브렌트유·두바이유 선물 기준)를 돌파했고 향후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유가가 급등하면 당장 물가가 들썩이게 되고 금리 등 각국의 통화 정책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각에서는 경기 불황 속에 물가마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다만, 중국 경제 둔화, 이란산 원유 공급 확대 등은 유가가 더 급등하는 것을 막는 '억제제'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배럴당 90달러 넘어선 유가…"100달러 돌파도 가능"
6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0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87.54달러에 장을 마쳤고,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11월물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0.56달러(0.62%) 오른 90.60달러였다.
직전 거래일에 지난해 11월 이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종가 기준 90달러를 넘긴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이날 장중 91.15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국제 유가는 경제 활동 둔화로 수요가 급감했던 팬데믹 시기에 하락했다가 작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후 크게 뛰었다.
전쟁 발발 후 여러 차례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했던 유가는 각국의 금리 인상과 함께 원유 수요 감소 전망이 나오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석유수출국기구(OPEC), OPEC+(플러스) 등의 감산 지속으로 공급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이어지면서 지난 6월 하순부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후 최근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감산 연장 결정을 하면서 공급 감소 우려가 더욱 커졌고 유가는 다시 상승 동력을 얻은 상황이다.
월가 일부에서는 이번 유가 상승세가 더 지속돼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한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DB금융투자의 한승재 연구원은 이날 "사우디 국영 석유업체 아람코의 성공적인 주식 매각을 위해서는 고유가가 유리하다며 (사우디의) 감산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가 들썩일 우려…통화 당국, 금리 놓고 고민
유가가 오르면 장바구니 물가도 덩달아 뛰게 된다.
인플레이션 전망에 악영향을 주게 되고 각국 당국은 금리 등 통화 정책 기조 재조정을 놓고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좌우하는 미국의 경우 작년 6월 9.1%로 정점을 찍었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7월에는 3.2%로 떨어졌다.
하지만 유가가 이렇게 들썩이면 물가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유럽 상황은 더 불안하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8월 소비자물가는 5.3%(속보치 기준)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유럽 경제 규모 1위인 독일의 8월 물가 상승률은 6.4%로 이보다 더 높았고, 영국의 7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6.8%로 진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물가는 금리 등 통화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기준 금리는 현재 2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인 연 5.25∼5.50%로 인상된 상태다.
금융시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이달 금리 동결 가능성을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로 최근 골드만삭스는 연준의 긴축통화정책이 종료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금융시장은 또 유럽중앙은행(ECB)이 이달 중 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확률도 25% 정도로 보고 있다. 이 수치는 앞서 60%에 달했었다.
하지만 고유가로 인한 물가 상승이 이어지게 되면 각국의 중앙은행도 긴축 기조의 기존 통화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준 금리를 낮춰 경기를 부양하는 식의 정책 도입은 고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도 지난달 25일 잭슨홀 연설에서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으로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 긴축적인 수준에서 통화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물가가 들썩여도 각국 중앙은행이 쉽사리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이미 지난 2년간 꾸준히 금리를 올려온 탓에 추가 인상 여지가 별로 없는 데다 이미 기업과 가계의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질 대로 커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기업·무역 등에도 '불똥'…스태그플레이션 우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10% 상승하면 기업의 생산원가는 평균 0.43% 상승하게 된다.
산업계는 원가와 물류비 부담이 커지는 등 채산성 악화에 시달리게 된다.
유가 상승 관련 수혜 업종으로 꼽히는 정유업계도 단기적으로는 재고 이익이 늘어날 수 있지만, 고유가 장기화는 오히려 수요 위축을 낳는 악재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가 급등이 TV, 냉장고, 자동차 등 소비자 제품 가격으로 전이되면 가계의 부담도 더욱 커진다.
소비자의 실질 구매력이 감소하면 국내 경제 회복에도 걸림돌이 된다.
DB금융투자의 한 연구원은 "수요 둔화로 원유 파생 다운스트림(각종 석유화학 제품 생산을 하는 단계) 마진은 당분간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수출과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유가 상승은 큰 부담이다.
일각에서는 11개월째 수출이 감소한 가운데 민간 소비마저 위축된 한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는 상황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연합뉴스에 "한국 무역은 6∼8월 3개월 연속 무역흑자를 보였는데 이는 유가 등 원자재가격 안정에 따른 수입 감소 영향이 더 컸다"며 "반도체 경기 회복 지연으로 수출 회복도 다소 늦어지는 가운데 유가 상승으로 무역흑자 기조가 약화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또한 최근 소비, 투자 등 국내 내수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유가 상승은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소비 둔화를 가속해 내수 및 성장률을 저하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 경기 둔화·이란산 원유 등은 유가 상승 관련 '변수'
향후 유가 변동에는 중국의 경기 상황, 이란산 등 '제3국'의 원유 공급 등이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유가 등락에는 OPEC+ 감산, 미국의 경제 지표와 원유 재고 상황, 금리 인상 등이 영향을 주는데 이번에는 다른 변수가 추가된 셈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6일 중국의 침체한 경기가 석유 수요를 감소시켜 가격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에 진입한 가운데 부동산 위기가 금융 시장 전반으로 확산할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금융정보 제공업체 차이신(財新)이 지난 4일 발표한 8월 중국의 서비스 구매관리자지수(PMI)도 51.8로 올해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의 경우 부동산 등에 이어 서비스 분야의 성장세도 상당히 더뎌지고 있는 셈이다.
앞서 조지프 맥모니글 국제에너지포럼(IEF) 사무총장은 지난 7월 "중국과 인도가 올해 하반기에 하루 200만배럴의 새로운 수요 증가에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중국의 경제가 예상만큼 빠르게 회복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제재를 받는 석유 수출국과 관련한 외교적 해법으로 원유 공급 확대를 모색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에너지 업계 정보분석 업체인 리스태드 에너지의 호르헤 레온 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 감산에 대응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더 많은 원유를 시장에 들여오는 것"이라며 이란산과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란 석유 수출의 경우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여름 감산을 시작한 이후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c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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